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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 떠났지만 7번은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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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6일 이종범 은퇴식을 기념해 전원이 이종범 유니폼(7번)을 입고 경기에 나선 KIA 선수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광주=김진경 기자]
이종범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빨랐던 사나이, 가장 화려했던 사나이가 떠났다. 전성기 시절 ‘바람의 아들’로 불렸고 훗날 ‘종범신(神)’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이종범(42)이 26일 고향 광주광역시에서 은퇴식을 했다.

 이종범은 이날 경기에 뛰지 않았다. 은퇴경기를 할 수 있었지만 엔트리에서 후배의 자리 하나를 빼앗아야 하기 때문에 거절했다.

 대신 26명의 이종범이 함께 뛰었다. KIA는 이날 LG전에 1군 선수 모두에게 등번호 7번과 이종범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입혔다. 1루수 최희섭도 이종범이고, 중견수 이용규도 이종범이었다. 26명의 이종범은 6-5로 재역전승, 19년 프로 생활을 마무리하는 ‘종범신’에게 승리를 바쳤다.

 경기 후 이종범 등번호인 7번의 영구결번식이 열렸다. 유니폼을 반납할 때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그가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자 26명의 이종범이 뒤를 따랐다.

 이종범은 199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이듬해 그는 최고 타자로 올라섰다. 124경기에 나서 196개의 안타를 때려냈으며 타율 0.393, 19홈런, 77타점, 84도루, 113득점, 출루율 0.452, 장타율 0.581을 기록했다. 홈런(공동 4위)·장타율(2위)·타점(5위) 타이틀을 따지 못했지만 나머지 부문에선 압도적인 1위였다.

 이종범은 정규 시즌 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두 차례씩 차지했다. 전통의 명문 해태는 조금씩 쇠락하고 있었다. 국보 투수 선동열을 일본 주니치에 팔았다. 그래도 해태는 이종범을 앞세워 96·97년 우승했다. 98년엔 이종범까지 팔았다.

 이종범은 일본에서도 바람을 일으켰다. 5월까지 타격과 도루 선두권에 있다가 6월 23일 한신 가와지리 데쓰로의 투구에 오른 팔꿈치를 맞고 쓰러졌다. 사구 하나로 한 시즌을 통째로 망쳤고, 이후 2년간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종범은 2001년 8월 KIA로 돌아왔다. 타이거즈 팬들은 팀 사정 때문에 해태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종범에 대한 미안함과 애잔함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이종범은 최고였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전에서 결승 2루타를 때려 대표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고, 2009년 SK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결승타를 터뜨리며 12년 만의 챔피언 등극의 초석을 놨다. 팬들은 그를 신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종범은 8개 포지션에서 뛴 최초의 프로 선수다. 유격수로 데뷔해 외야수로 뛰다가 구멍이 생기면 포수 마스크도 썼다. 프로에서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한 포지션이 투수다. 이종범은 은퇴식에 앞서 시구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타석에는 휘문중에서 야구를 하는 아들 정후(14)가 들어섰다. 이종범은 “정후가 나의 도루 기록을 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들을 남기고 간 ‘바람의 신’은 그라운드를 떠나 신전(神殿)으로 올라갔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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