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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다 잃고, 다시 찾는 길… 路는 잃었어도 道에 다가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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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10면

1, 2 세계에서 셋째로 긴 양쯔강. 강 하구의 삼각주 공업지대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0%에 해당하는 재화를 생산하는 곳이다. 자동차들이 마치 찬합에 담긴 밥알처럼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3 공장 지대 사이에 들어서고 있는 주택 단지. 미국의 타운하우스와 흡사하다. 4 도자기 공장. 여기서 생산한 화려한 무늬의 도자기가 한국에 들어오면 제법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한다.

도로(道路)는 도와 로가 결합된 단어인데 도로명을 표기할 때 도는 쓰지 않는다. 세종도, 강남대도는 없다. 국도라고 하듯이 특정한 길이 아니라 길의 체계를 뜻할 때만 도를 쓴다. 도는 구체적인 길이 아니라 추상적인 길이다. 도(道)를 뜯어보면 머리 수(首)와 달릴 주(走)가 보인다. 머리가 달린다. 그래서 생각이 달려서 궁극의 이치에 다다를 때 도를 깨쳤다고 하는가 보다. 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겠지만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학설은 이것이다. 옛날 전쟁에서 이기면 적장의 머리를 베어서 말에 매달아 가져갔다. 머리를 매달아 가져가는 과정을 도라고 불렀고 그게 길을 뜻하게 됐다는 것.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⑤ 상하이~쑤저우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썼다. 우주의 원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만 도의 어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피비린내 나는 ‘도’로 도를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게 아닐까. 어쨌든 도는 우주의 운행 원리라는 뜻과 함께 길로도 쓰이는데 길로 쓸 때는 중국에서도 로와 다르게 쓴다. 예컨대 ‘인민대도’는 길 이름일 뿐 아니라 인민을 위한 길이라는 가치가 들어 있다. 왕복 10차로를 넘지 않는 한 함부로 도를 붙이지 않는다. 우리말로 하면 길 한 글자이지만 길은 이동경로와 함께 뭔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을 뜻한다. 나 역시 로를 따라가지만 그냥 풍경을 완상하는 게 아닌, 뭔가를 얻고 싶은 것이다. 그걸 편의상 도라고 해두자.

내륙으로 떠난 첫날 길을 잃었다. 상하이 안에서 빙빙 돌았고 상하이를 벗어나서는 312국도를 여러 번 놓쳤다. 특히 312국도를 따라 주행하는 건 마치 기다란 용의 등에 올라탄 것 같았다. 같이 신나게 달리다 그가 한 번 용틀임을 하면 나는 나가떨어졌다. 그가 지나간 흔적을 더듬더듬 찾아서 올라타면 또 떨어지고….

분명 312국도의 기점이 인민광장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광장 근처에서 312국도의 기점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구글의 지도를 보니 인민광장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우링로와 마주치고 우링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가면 차오안공로를 만나 312국도로 연결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링로를 찾지 못해 헤맸는데 그것은 나사 조임의 방향을 잊어버리듯 동서남북의 방향감각을 헷갈려서가 아니었다.

5 312국도를 가리키는 표지판. 쑤저우·난징·허페이·난양·시안을 연결하는 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머리는 서쪽을 지향하지만 눈은 동으로 가고 있다는 점. 처음 훙차오(虹橋)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 무조건 동으로 가야 했던 관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가운데 두 시간을 달렸는데 어제 ‘산돌’님과 만나 눈에 익은 연핑루와 창링루의 사거리를 벌써 두 번 지나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같은 장소를 돈다는 것은 달아나야 하는데 계속 제자리걸음 하는, 가위눌린 꿈과 같다. 서쪽으로 한참 가다가 다른 길의 동쪽 표지판이 보이면 동쪽으로 돌아가고, 아닌 것 같아서 휴대전화 속의 구글 지도를 보고 다시 서쪽으로 가고,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여행하거나 나이 들면 관성에 의해 살고 있는지를 항상 확인해봐야 한다. 그 덕분에 못 본 상하이를 많이 봤다. 자전거 여행이 좋은 점은 과정이 여행의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312국도를 결국 찾았을 때 이제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출발 전에 나는 이 국도를 찾아내고 환호했다. 중국의 교통지도는 숫자와 알파벳이 덩어리져 있는 난수표 같다. 지도를 펼치자마자 바로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고 찬찬히 보면 G, S, X의 알파벳이 숫자와 결합돼 있는 규칙성이 보인다.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고속공로 때문에 헷갈리기는 하지만 G는 국도의 중국어 발음(guodao)의 두음을 딴 것. 마찬가지로 S는 성도(Shengdao), X는 현도(Xiandao)의 두음을 딴 것이다. 중국의 행정구역에는 성 또는 직할시, 그 다음으로 시 또는 현, 그 다음으로는 진, 향, 촌 등이 있지만 오늘은 현까지만 기억하자.

다음은 숫자 풀이. 제일 앞 숫자가 중요하다. 국도의 경우 1로 시작한다면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도로라는 걸 의미한다. 2는 남북종단, 3은 동서횡단로를 뜻한다. 성도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 1로 시작한다면 성의 행정중심 도시의 방사형 도로이고, 2는 남북종단, 3은 동서횡단로다. 예를 들어 G109는 베이징에서 티벳의 라싸(拉薩)까지 가는 3901㎞의 국도여서 1로 시작하고, G205는 산하이관(山海關)에서 광저우(廣州)까지 남북으로 오가는 3160㎞의 길이어서 2, 그리고 312국도는 상하이에서 카자흐스탄과의 국경도시 이닝(伊寧)까지 4967㎞를 횡단하기 때문에 3으로 시작한다. 한 가지 더. 방향이 동서 또는 남북으로 분명치 않고 이리저리 튀는 국도는 0으로 시작한다.

중요한 건 동서횡단은 홀수, 남북종단은 짝수라는 걸 기억해두자. 이것은 미국과는 반대다. 미국은 동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종단하는 I-95가 홀수이듯 종단길이 홀수다. 대표적인 짝수 횡단길은 루트66이다.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하는 3940㎞의 이 길은 미국의 메인 스트리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길의 이름을 딴 노래도, TV 연속극도 있어서 미국인들에게 친숙하다.

미국의 공영방송 NPR의 베이징 주재기자였던 로버트 기퍼드는 312국도를 따라 자동차 여행을 한 뒤 펴낸 ‘차이나 로드’라는 책에서 312국도를 중국의 루트66이라고 소개했다. 둘 다 동서를 횡단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루트66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의 도로를 찾는다면 중국에서는 312 대신 310이어야 할 것 같다. 310국도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시안(西安)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건설한 9대 대로 중 시안과 뤄양(洛陽), 정저우(鄭州) 구간이 겹친다. 이렇게 역사를 놓고 보면 중국의 루트66이라는 말이 어색하다. 길은 중국에서 먼저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 장동건 보고 조인성 닮았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근대에 들어와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도로 체계를 서양식으로 바꿨지만 중국도 도로의 역사와 체계가 있었다. 이전에는 남북종단로는 경(經), 동서횡단로는 위(緯)로 불렸다. 경도와 위도의 그 경위다. 그리고 성을 도는 도로는 환, 성 밖을 나가는 도로는 야라고 불렀다. 312국도를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G312 대신 경으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예전에 상하이는 이름 없는 어촌이었을 뿐이다. 312국도는 오늘의 목적지 쑤저우(蘇州)와 난징(南京), 허페이(合肥), 난양(南陽), 시안을 지나가니까 과거에는 난징과 시안을 연결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312국도를 따라 북서 방향으로 시안까지 간 뒤 거기서 기수를 동북으로 돌려 310을 따라 베이징으로 향하게 된다. 얼마나 간단한가. 312국도만 따라가면 된다는 게….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고 오늘 쑤저우까지 가지 못하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쑤저우에서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샹신위안(項新元)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쑤저우로 가는 길에서 분명 도시계획법이 있을 텐데 읽혀지지가 않는다. 상하이의 주거지역이 끝나고 농산물 도매시장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허름한 공장지대가 나오다가 다시 미국의 교외주택단지 같은 중산층 주거지역이 나오고 다시 공장이 시작되고 논밭이 나오고 다시 공장이 나오고 대학이 나오고…. 그리고 쿤산(昆山)에 이르면 초고층 빌딩이 줄을 잇고…. 어쨌든 대체로 양자강의 삼각주 공업지대를 통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점하는 재화가 생산된다.

312국도는 강을 만나 고가도로를 건너야 하는 지점에서 나를 외면했다. 나는 이제 잊어버릴 수 없는 서진(西進)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312국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샹신위안 가족한테 전화는 걸려오고 갈 길은 아직 한참 남았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출발 전 밤에는 주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사고 위험도 있고 밤에는 주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국도에도 가로등이 없다. 첫날부터 원칙이 깨질 줄이야. 경적을 울려대는 화물차들의 행렬 속에 나라는 존재를 알리는 자전거의 전조등은 초라했다. 하지만 해 저물 무렵 지평선 끝의 광활한 교차로에서 입간판들이 하나 둘 불을 켜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낯선 곳에 드디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랑하는 자의 꿈 같은 것이다.

마지막에는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헤맸을지 모른다. 그가 선도하면서 길을 안내해줘 샹신위안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 앞까지 도착했다. 이미 저녁 8시 반이 넘었다. 96㎞를 주행하는 데 9시간이 걸렸다. 첫날의 호된 통과제의였다. 그래도 로(路)는 잃었지만 도(道)에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자위해본다. 여행은 도와 로를 따라가는 과정이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6월 23일까지 중국 자전거 여행을 하는 필자의 소식은 매일 미투데이(http://me2day.net/zixingche)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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