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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시트 다음은 드라크마겟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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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29면

외환위기로 1998년에 시작된 구조조정. 얼마나 걸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돌아온 정부 관계자의 답이 이랬다. “10년.” 그리 오래 걸릴까. 지혜와 기술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돌아보면 그것도 짧았다. 당시 공적자금이 들어간 한 은행, 그 민영화는 아직 진행형이다.

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500년 자본주의의 유럽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리스가 다시 벼랑 끝에 섰다. 총선 후 정부 구성에 실패한 게 위기 재발의 도화선이 됐다. 이게 몇 번째인가. 매번 풀리는 듯하다 다시 꼬인다. 지금은 유로존 이탈, 이른바 ‘그렉시트(Grexit·Greece exit)’가 키워드다. 지난해 유럽중앙은행(ECB)이나 회원국 정부 책임자에겐 그걸 입밖에 내는 게 금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렉시트에 대비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내년 1월 1일을 D데이로 콕 찍은 시나리오마저 등장했다.

시장은 가상의 이탈 수순을 점검했다. 지폐 인쇄기부터 챙겨봤다. 유로화를 버리자면 새로운 화폐(신 드라크마)를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장 난 인쇄기 딱 한 대가 아테네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그리스중앙은행이 지폐 인쇄, 동전 주조 시설을 홀라르고스(Holargos)에 보유하고 있는 게 확인됐다. 인쇄기 확보엔 문제가 없다.

다음은 ‘극비’ 인쇄다. 그리스 정부가 그렉시트를 준비한다는 정보만으로도 유로화를 손에 넣기 위한 예금인출 사태 등 파국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과연 치밀한 기획이 요구되는 극비 인쇄에 성공할 수 있을까.

화폐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렉시트가 일어난다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 급여 등을 쿠폰이나 임시지폐로 지급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쿠폰이나 임시지폐는 금방 위조돼 진짜까지도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수 있다.

혼란 끝에 신 드라크마가 통용된다고 하자. 화폐가치는 최대 70% 하락하고 무역 붕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뒤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리스는 국내외 채무를 새로운 통화로 전환하려 하겠지만, 외국 채권자들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리 없다. 기다리는 건 수년에 걸친 채무조정 협상이다.

그렉시트가 세계 경제에 미칠 충격파는 어느 정도일까. 그리스 총선 이후 국제금융시장의 움직임은 맛보기 수준일 것이다. ‘드라크마겟돈(Drachmageddon)’은 우주로 따돌림당한 옛 통화 드라크마가 운석처럼 지구에 떨어져 초래한다는 종말의 아마겟돈을 뜻하는 신조어다. 불가측성의 공포가 극도로 과장됐다.

그렉시트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그 뒤다. ‘질서 있는 분리’란 방향성, 자금 지원 같은 통증 완화 대책이 수반돼야 한다. 세심한 계획과 다수의 합의는 필수다. 유로화의 갈 길도 정해져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해법의 대전제는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다. 다음 달 치러질 그리스 재총선은 그게 가능한지 판가름할 분수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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