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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JP·오히라 정치적 타결…한·일 청구권 협정 다시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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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4일 대법원의 ‘일본기업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로 47년 전의 한·일 청구권 협정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협정은 1965년 6월 22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서명함으로써 발효했다.

 협정의 원래 이름은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이다. 강제병합의 역사를 끝낸 대한민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협정이다. 그 핵심은 ‘식민지 피해 청산’이었다. 한국 정부는 근대화와 가난 구제를 위한 종잣돈이 필요했고, 일본은 어떻게든 식민지배의 ‘부채’를 털어낼 필요가 있었다.

 협상은 간단치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시작한 협상은 국민들의 반대 시위와 외교 갈등을 지속하면서 13년8개월을 끌었다. 정부가 국교 정상화 방침을 밝힌 64년엔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른바 ‘6·3 사태’다. 7차 회담 때 열린 협정식은 위수령과 계엄령 속에서 진행됐다.

 우리 정부의 협상은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51년 회담 때 전승국 자격으로 전쟁 배상 요구를 하려 했지만 국제 현실은 냉엄했다. 일본은 전쟁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청구권자금)이란 용어로 일관했다. 속도를 낸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다. 제6차 회담 때인 62년 11월 한국의 7억 달러 요구에 일본은 7000만 달러로 맞서면서 교착에 빠졌다. 이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이 정치적 타결에 나섰다.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양측은 청구권 금액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했다. 당시 회담 진전 과정이 비밀에 부쳐지면서 반대 시위는 더 격화됐다.

 한·일 기본조약은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구성됐다. 47년 전 논란의 핵심은 부속협정 제2조 1항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군 위안부 배상 문제를 놓고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한 것이나, 이날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도 모두 이 조항을 겨냥한 것이다. 여기엔 “양 체약국은 양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돼 있다. 일본은 이 조항으로 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이미 소멸됐다고 주장해 왔다. 정부도 이 조항 때문에 피해자들의 요구를 외면해 왔다. 협정 체결 뒤 정부는 양국의 과거청산 대가로 5억 달러를 들여와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 등 에 투자했다.

그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대부분 한국과 일본의 법원에서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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