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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48> 한국 화장품 10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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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강승민 기자

우리나라 근대 화장품 역사는 거의 100년에 육박합니다. 본격적인 상업용 화장품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내 최고(最古) 기업으로 꼽히는 두산그룹의 모태 ‘박승직 상점’에서 낸 ‘박가분’을 근대 화장품의 효시로 치기 때문입니다. 박가분은 이름 그대로 ‘박씨네 상점에서 만든 분(粉)’입니다. 곱고 뽀얀 얼굴을 만드는 데 쓰는 화장품이죠. 그로부터 한 세기, 한 해 10조원 매출을 넘보는 한국 화장품의 역사를 알아봤습니다.

의약품에서 갈라진 화장품의 역사=1999년 제정된 ‘화장품법’엔 화장품의 정의가 다소 복잡하게 나와 있다. ‘인체를 청결·미화하여 매력을 더하고 용모를 밝게 변화시키거나 피부·모발의 건강을 유지 또는 증진하기 위해 인체에 바르고 문지르거나 뿌리는 등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물품으로서 인체에 대한 작용이 경미한 것’으로 돼 있다. 화장품의 법적 정의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인체에 대한 작용이 경미한 것’이란 부분이다. 인체에 경미하지 않은 작용을 하는 것은 의약품으로 분류해 따로 규제하기 때문이다.

 법률적 정의에서 보듯 화장품의 뿌리는 본래 의학과 약학에서 갈라져 나왔다. 현대 화장품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삼국시대 문헌에서도 존재를 찾을 수 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 문화대 백과』엔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남다른 미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해 화장술과 화장품이 발달했다’고 나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시대엔 머리 치장에 쓰는 향유(香油)가 수출되기도 했고, 조선시대엔 일본에서 화장수인 ‘미안수’ 제조 기술을 모방할 정도였다고 한다.

 창포에 쑥을 넣어 함께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것도 넓은 의미의 화장품 범주에 속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조선시대 귀부인 이미숙이 단장을 할 때 쓰는 분이며 입술에 바르는 붉은 가루 등도 이 시대 화장품이 널리 쓰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태평양(현재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이 1960년 내놓은 ‘코티분백분’. 프랑스 화장품 기업 코티와 기술제휴로 만들었다.

‘박가분’으로 시작된 근대 화장품=국산 화장품의 효시로 꼽히는 박가분은 당시 거상이던 박승직의 부인이 상점의 고객 사은품으로 처음 만들었다. 정식 제조허가를 받아 시판에 나선 것은 1922년으로 알려져 있다. 박가분이 큰 인기를 끌자 서가분·장가분 등 유사 제품까지 등장했다. 1937년까지 인기리에 판매된 이 제품은 얼굴을 뽀얗게 보이게 바르는 미세한 화장가루였다. 쌀가루나 조개껍데기, 분꽃씨 등을 빻아 만들었는데 납을 넣지 않은 상태의 ‘백분’은 얼굴에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백분에 납을 섞은 ‘연분’을 바르면 화장이 더 오래가고 곱게 됐지만 분독이 문제였다. 계속 사용하면 땀구멍이 커지고 본래 얼굴색이 칙칙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연분 형태의 박가분은 효과에 대한 논란끝에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 또 하나의 근대 화장품이 개성에서 나왔다. 잡화점을 운영하던 윤독정(1891~1959)씨가 개발해 1932년부터 판매한 머릿기름이다. 윤씨는 현재 국내 최대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사장의 할머니다. 윤씨의 아들인 성환(1924~2003)씨가 1930년 개성에 세운 ‘창성상점’에서 윤씨가 만든 동백 머릿기름은 아모레퍼시픽의 현재를 있게 한 제품으로 기록돼 있다. 이 무렵 태양리화학·동방화학·동보화학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설립한 화장품 회사가 속속 등장해 국내 화장품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1947년, 현재 LG그룹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1907~1969) 회장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다. 제품명은 ‘럭키크림’이었다. LG화학·LG생활건강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사’에서 낸 첫 화장품이다. ‘동동구리무’의 대명사로 불린 제품이다. 동동구리무는 크림의 일본말 발음인 ‘구리무’란 말과 화장품을 팔러 다니던 상인들이 북을 ‘동동’치면서 다닌다고해 ‘동동’을 합쳐 부르던 별칭이다.

1 근대 한국 화장품의 효시로 꼽히는 ‘박가분’.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에서 1915년 고객 사은품으로 처음 만들었다. [중앙포토] 2 1950년대 남성용 머리 화장품의 대명사로 불린 ‘ABC포마드’. 51년 말 화장품 회사 태평양이 만든 제품이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3 LG생활건강이 창립 65주년을 기념해 만든 ‘럭키크림’. 원안 사진은 1947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에서 만든 ‘럭키 크림’이다. [사진 LG생활건강] 4 아모레퍼시픽이 발행하는 화장품 전문 잡지 ‘향장’의 1980년 3월 표지. 표지 모델은 배우 임예진이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PX에서 흘러나온 외제 화장품=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생산 시설이 파괴된 1950년대는 미군 매점 PX에서 흘러나온 외제 화장품이 인기를 끌었다. 아모레퍼시픽 자료에 따르면 당시 외제 화장품의 시장 점유율은 80%를 웃돌았다. 이런 이유로 가짜 외제 화장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군매점에서 흘러나온 화장품을 입수할 수 있는 소위 ‘양공주’들이 화장품을 주로 쓰게 되면서 한동안 ‘화장=직업여성’이란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지기도 했다. 사회적 배경이야 어찌됐든 이 당시 화장법 트렌드는 직업여성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청순한 이미지의 오드리 헵번, 관능의 상징인 메릴린 먼로 등이 여성들이 닮고자 하는 모델이 됐던 시기다.

 입술엔 새빨간색을 칠하고 눈썹은 두껍고 진하게 그리는 게 유행이었다. 아이라인를 길게 그려서 눈매를 강조했고 먼로처럼 얼굴에 애교점을 찍기도 했다. 50년대 초반엔 가루분과 초기 단계의 산업화된 국산 화장품이 선보였다. 현재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에서 ‘ABC 100번 크림’등을 내놓아 히트를 쳤다.

 50년대를 풍미한 제품으로는 ‘ABC포마드’를 빼놓을 수 없는데 남성용 머리 화장품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피마자유를 쓴 ‘순식물성 포마드’를 내세워 시장을 휩쓸었다. 아모레퍼시픽 사사(社史)에는 “부산에서 열차로 보낸 제품이 서울역 집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매상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모두 인수돼 따로 물류창고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돼 있다.

60년대를 주름잡은 ‘코티분백분’=‘코티분백분’은 60년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기억 속에 강력한 존재감으로 각인돼 있는 제품이다. 프랑스의 유명 화장품 회사 코티에서 만든 분인데 파운데이션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66년 정도까지 국내 화장품 시장을 주름잡았다. 국산분 제품이 나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등 선진국의 화장품 기업과는 기술 격차가 컸을 때였다. 국내 화장품 회사는 이런 기술 격차를 해외 선진 기업과의 기술 제휴로 돌파하려 했다. 코티분백분은 태평양이 프랑스 코티와 기술제휴해 만든 제품이었다. 출시 당시인 1960년만 해도 코티분 하나 가격이 쌀 서너 말 값에달할 정도의 고가였다. 이런 비싼 가격 때문에 이것 역시 진짜보다 모방품이 더 많이 출시됐다고 한다.

 61년 군사정부는 국내 화장품 시장에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 줬다.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밀수품이나 가짜 외제 화장품을 강력하게 단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법’으로 특정 품목 제품은 일체 외제 상품을 수입하거나 유통할 수 없게 하는 조치였다. 여기에 화장품이 포함돼 있었다. 이 때문에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앞선 기술력을 갖춘 외국 화장품 회사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국화장품·피어리스·대도약품·동양화성·유한양행 등이 이 시절 국내 화장품 업계에 새로 도전장을 낸 기업들이었다.

‘멍든 눈, 쥐잡아 먹은 입술’=장발과 통기타로 상징되는 70년대 젊은이들의 문화는 화장품 트렌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외 매체에 등장하는 팝스타나 배우들의 화장법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화장법도 이를 반영해 변화했다. 아이섀도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눈두덩 주변에 반짝거리는 ‘펄 섀도’를 바르는 것이 유행했다. 입술 색도 새빨간색에서 점점 더 짙은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세간에선 이런 화장법을 두고 ‘입술은 쥐를 잡아먹은 것 같고 눈은 한 대 얻어맞아 멍든 것 같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80년 12월 컬러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 화장품 시장은 일대 변화를 겪게 된다. 경기 호황 덕에 소비가 늘어난 데다 컬러TV를 통해 여성들이 색조 화장에 눈을 뜨면서 화장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여권 신장과 더불어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도 여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화장품 업계를 좌우하던 트렌드는 ‘입체 화장법’이다. 볼 바깥쪽과 턱선을 따라 짙은 색으로 음영을 줘 서양 사람처럼 윤곽이 뚜렷해 보이게 만드는 화장법이다. 또 83년 화장품 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 화장품과 본격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해외 화장품과 차별화하기 위해 한방 원료를 섞은 한방화장품이 처음 등장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84년엔 럭키주식회사(LG생활건강의 전신)의 화장품 브랜드 ‘드봉’이 첫선을 보였다. 드봉은 89년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를 광고 모델로 기용해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TV에서 ‘드봉’을 외치는 소피 마르소의 모습은 당시 여성들은 물론 많은 남성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장품 한류의 태동=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화장품 브랜드는 대개 90년대부터 생겨났다. 색조 화장품과 향수 시장이 큰 해외 선진국과 달리 국내 화장품 시장은 주로 기초 화장품 위주로 성장 중이다. 2000년대에는 샤넬·디올·랑콤·에스티로더 등 해외 유명 화장품 브랜드도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국내에선 기존의 업체 외에 다양한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이 나오면서 한국 화장품 시장은 이제 10조원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0조원 시장은 국내 소비자들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한국 드라마와 K팝 열풍으로 인해 최근 국내 화장품 시장엔 일본·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고객들도 유입되고 있다. 이른바 ‘뷰티 한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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