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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떨어진 구세대보다 튀는 신세대가 벤처 이끌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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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20면

중앙포토

전생에 몽골 칭기즈칸의 후예였을까. 방랑벽 많은 사업가임엔 틀림없다. 국내 최고 벤처 부자인 김정주(44·사진) 넥슨홀딩스(NXC) 대표 이야기다. KAIST 석사를 딴 직후 게임 회사를 세워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뒤, 경영은 후배에게 맡기고 가방을 싸매 일본·구미 등지를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벤처=창조=도전’이란 철학으로 청바지를 즐겨 입고 머리를 간혹 노랗게 물들이는 자유인이다.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은둔의 사업가’를 제주로 찾아가 어렵사리 만났다.
꼭 3년 전 제주로 넥슨 본사를 옮긴 일이나 6개월 전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기업공개를 한 일, 일반의 허를 찌르는 파격 결정이었다. 지난해 12월 일본 증시에 넥슨을 상장한 김정주 이름 석자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한국 3대 주식 부자 반열에 올렸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에 이어 세 번째다. 오로지 온라인 게임사업 하나만 따져서 그렇다. 넥슨은 국내 게임업계 처음으로 지난해 연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해외 매출 비중이 큰 수출기업이다. 1994년 넥슨을 설립한 김정주는 96년 세계 첫 그래픽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같은 화제작을 잇따라 히트시켰다. 이제 20대가 된 젊은 세대나 초·중·고생들 사이에선 ‘게임의 지존(至尊)’이다.

한라산에서 만난 한국 주식 3대 富者 김정주 넥슨 창업자

日증시 상장 6개월, 제주 본사 이전 3년
지난 16일 한라산의 어리목 등산로 입구에서 그를 만났다. 자연휴식 중인 백록담을 비켜 윗세오름 정상까지 올랐다가 영실휴게소로 내려오는, 5시간 가까운 등산길을 동행했다. 기자의 느린 보폭에 맞추느라 그에겐 서너 시간이라는 등산길이 길어졌다. 아담한 키, 평범한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나타난 그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언론 인터뷰라면 곤란하고, 오랜만이니 산에 오르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자”고 선을 그었다. 회사나 사생활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나 선(禪)문답이었다. 그래도 기자로서 궁금한 것들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벤처와 게임산업의 미래, 게임 청소년 유해론 등에 대해서는 흐릿하게나마 소견을 내비쳤다.

어리목 등산코스 입구를 떠나면서 “미 포브스에 의해 한국 3대 주식 부자에 선정된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으로 운을 떼봤다. 그는 “몹시 부담스럽다. 나를 부자로 보는 시선이나 웅성거리는 얘기가 싫다”고 잘라 말했다. 지주회사인 넥슨홀딩스에 대한 그의 지분은 48.5%, 부인 등 관계인 지분까지 치면 70% 가까이 된다. 포브스는 그의 주식가치를 43억 달러(약 5조원)로 평가했다. 그는 “주식가치를 숫자로 표시한 것일 뿐 내 생활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 손수 차를 몰고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가고, 토속 돌하루방 풍취를 느끼려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한라산을 틈틈이 오르내리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거나 낚시를 하는 것이 여가이자 운동이다. 제주를 찾는 지인들과 골프도 친단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제주가 편하다”고 했다.

제주도 한라산의 윗세오름 정상에 올라 기자와 함께 기념 촬영한 김정주(왼쪽) 넥슨홀딩스 대표.

험한 돌길에 이어 나무 계단이 나타나자 제주 예찬론을 펼쳤다. “능숙한 산악인들은 나무 계단을 싫어할지 모르지만, 보통사람이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도록 배려한 것이 좋아요. 제주 지방정부가 어떤 때는 세금을 헛된 곳에 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잘 하는 것 같아요.” 조금 지나 “넥슨을 한국이 아닌 일본에 상장한 이유는 뭐냐”고 물어봤다. 그는 “너무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달라. 벤처든 대기업이든 글로벌화는 생존 전략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게임 강국인 일본에서 승부를 걸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경영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서 별로 할 말이 없다. 일본 상장은 괜찮았다. 오랜 친구인 최승우 일본재팬 사장이 잘했다”고 공을 돌렸다. 넥슨홀딩스는 도쿄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돼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았다. 주가가 상장 초기 떨어졌지만 지난해 실적이 좋게 나타나자 3월 말부터 상승세를 타서 상장 공모가(1300엔)를 넘었다. 1560엔까지 오른 주가는 최근 유럽 재정위기가 다시 몰아치자 18일 1380엔까지 떨어졌다.

넥슨 갈 길 아직 멀어 안주하면 무너져
윗세오름 정상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넥슨이 정상에 올랐으니 이제 다른 사업 구상도 하겠다”고 넘겨짚자 “부자란 말 못지않게 듣기 싫은 얘기가 정상”이라고 응수했다. 얼마 전 넥슨 고위 인사는 일본 상장에 대해 “미국 메이저리그에 입단해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친 정도로 앞으로 할 일(홈런)이 많다”고 평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넥슨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 멀었다”며 호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들었다. 평소 주변에 자주 말한다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안주하면 넥슨도 금세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넥슨은 올해 소셜네트워크게임(SNG)을 10종 가까이 출시하는 등 모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부문을 키우고 있다.

대부분 40∼50대인 벤처 1세대가 SNS 관련 사업에 나서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다들 친한 선배이자 친구이지만 그건 아니다. 감이 떨어진 구세대는 물러나야 한다. 튀는 신세대가 벤처업계를 이끌어야 한다. 내가 경영에 일일이 참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엔젤투자(창업 초기 벤처투자)로 잇따라 대박을 터뜨린 장병규 본엔젤스 창업자를 칭찬했다. “자주 만나 얘기하는데…. 독종이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이해진 NHN 창업자도 장병규가 무서울 것”이라고도 했다.

김정주는 KAIST 후배나 창업 준비생에게 ‘창업할 것’ ‘남과 다르게 할 것’을 유독 강조했다. 얼마 전 KAIST에서 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도 “대기업에 취직해 안주하지 말고, 나중에 월급을 줄 수 있는 창업자의 길을 택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도 “특히 창업을 준비할 때는 남들과 다르게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급경사가 많은 영실 코스를 따라 내려가자 깎아지른 절벽에 500여 개 기암괴석이 박힌 ‘오백나한(오백장군)’ 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등반 가이드 못지않게 한라산 곳곳을 설명해 주는 그에게 “이제 제주에 안착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3∼5년마다 거주지를 옮겨 왔다. 서울에서 일본·미국으로, 다시 서울·제주로 가족과 함께 움직였다. “노마드(유목민)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회사는 제주에 두겠지만 조만간 부산 가 살 생각이 있어요. 좋은 곳을 봐놨지요.”

정치권과 교육계의 게임 유해론, 게임 규제론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게임 중독은 문제”라고 전제하면서도 “근본대책은 따로 있다”고 강조했다. “하루 종일 사설 학원을 맴도는 청소년들에게 학부모나 정부가 어떤 놀이문화를 제공할지 관심이나 가져봤느냐. 놀이문화가 풍부하면 게임에 몰입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을 줄이는 추세도 못마땅해했다. 넥슨은 지난해 8000억원의 수출 실적을 거둬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게임회사를 마치 유해물 생산 집단으로 몰아가는 일부 시선이 섭섭한 눈치였다.

김 대표가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생각을 하는 것은 사회공헌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부산시 해운대 센텀시티에 ‘넥슨커뮤니케이션즈’ 자회사를 최근 설립했다. 게임 관련 문의를 온라인으로 해결해 주는 고객서비스 회사다. 그는 “직원 80% 이상인 24명이 장애인이다. 앞으로도 장애인 채용을 꾸준히 하겠다”고 소개했다. 게임과 예술을 접목하는 행사에도 공을 들인다. 얼마 전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게임 캐릭터를 소재로 한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평소에도 “게임이 애들이나 즐기는 문화라는 선입견을 없애겠다”고 말한다.

김택진 NC 대표와 야구·골프 장외대결
빨간 지붕의 휴게소가 멀리 보이자 등산로는 급경사 절벽에서 완만한 돌길로 바뀌었다. 야구와 골프에 대해 물었다. 그가 두 스포츠의 광팬이어서다. 프로야구 제9구단을 창단한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업자가 서울대 절친 선배지만 게임과 스포츠에선 한 치 양보 없는 경쟁자다. 넥슨은 2010년부터 일본 지바 롯데를 후원한 데 이어 올해부터 부산 롯데 자이언츠를 지원한다. 그는 “무슨 경쟁이냐. 야구를 좋아할 뿐”이라면서도 “2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 500여 명의 넥슨 직원들이 몰려가 롯데를 응원한다”고 전했다.

골프와의 인연은 이랬다. “고교생 유망 골퍼들을 후원하는 모임에서 연락이 왔길래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벌써 몇 년째다. 이제 프로골퍼가 된 김비오 등이 국내외 대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 선수는 지난 13일 끝난 ‘원아시아투어 2012 GS칼텍스 오픈’에서 우승했다. 그는 “비오가 마침 17일부터 열리는 ‘오픈 2012’(SK텔레콤)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에 왔다. 오늘 저녁에 우승 축하 고기 파티를 하기로 했다”며 웃었다.

영실휴게소에 이르자 해가 지고 있었다. 저축은행 사태 등 도덕적 해이 풍조를 거론하자 그는 “언론이 그런 기사를 덜 다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게 말이 되나. 이젠 지겹다. 마음 따뜻한 기사를 더 많이 다뤄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김정주 서울 출생, 1991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 93년 KAIST 석사, 94년 넥슨 창업, 2011년 일본 도쿄 증시에 넥슨 상장, 2012년 미 포브스 선정 한국 주식 부자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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