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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깔끔한 집, 억압된 성적 욕망 표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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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한 관심이 풍성해져 ‘말하는 건축가’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가 인기더니 가난한 식구들의 좁은 공간을 보여 주는 ‘풀하우스’란 개그코너까지 등장했다. 집을 순례하다다시 집을 순례하다 같은 서적도 관심을 받는다.

집을 단순히 축재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미학적 가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반가운 일이다. 얼핏 돈만 있으면 화려하고 우아하게 살고, 가난하면 좁고 지저분한 공간을 감수해야 할 것 같지만 집의 아름다움은 꼭 돈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쉼 없이 사서 정리도 못 하고 버리지도 않는 클러터 증후(Clutter syndrome)에다 색채와 구조에 대한 안목까지 없으면 아무리 큰 집도 어지럽고 숨 막힌다. 우울하거나 불안하면서 다른 이들 따라 꼭 무언가를 사야 하는 사람의 집 역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욕망의 절제를 배우지 못한 요즘엔 소유에 집착해 물건의 노예가 된 사람도 많다.

특히 부엌과 화장실에는 너무 뭐가 많으면 불결해지기 십상이라 위생에도 좋지 않다. 수술 후 처음 세수하고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몸 회복의 표지인 것처럼 집의 꾸밈새와 정신세계는 유사하다.

풍수를 인테리어에 접목하는 사람들은 특히 ‘기(氣)’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건이나 가구로 출구가 막혀 있거나, 뾰족한 물건이 방문을 가리킨다든가, 색과 무늬가 어지러운 물건으로 가득하거나, 큰 TV 앞에 일렬로 놓인 소파는 나쁜 풍수라고 한다.

환경이 심리를 좌우한다는 환경심리학과도 통한다. 사적 공간이 보호받지 못하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집, 환기가 안 돼 퀴퀴한 냄새에 곰팡이가 피는 집, 비비며 살가운 대화를 하기 힘든 너무 큰 집 역시 정신 건강에 나쁘고 가족 간 불화할 가능성도 있다.

주변을 압도하는 마천루는 위험하고 오만한 현대인의 팽창된 자아처럼 보이고, 자연과 조화롭게 함께하는 서원이나 수도원은 초월적 존재 앞의 겸손을 상징하는 것 같다. 교도소나 병원의 어둡고 획일적인 건축, 거리의 어지러운 소음은 그 자체로 징벌이다. 층간 소음, 쓰레기장이나 복도 등 공동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웃 간의 갈등으로 인한 법적 분쟁도 늘고 있다.

몸은 현대에 있으나 마음은 영역 싸움에 목숨 거는 영락없는 원시인들이다. 선불교에 깊이 빠졌던 스티브 잡스는 가구가 거의 없는 절제된 공간을 선호한 반면 피카소는 프라이팬에 소변을 볼 정도로 지저분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도 이부자리와 책밖에 없는 검박한 살림 속 함께 사는 생쥐나 벌레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어쩜 진짜 중요한 것은 주거환경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창조적 시선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필자의 집은? 30년 가까이 흘러도 고치기 힘든 게 몇 가지 있다. 시어머니께서 하루 종일 크게 틀어 놓으시는 마루의 TV 소리와 치우는 것을 귀찮아하는 두 아들의 방 등이다. ‘돼지처럼 살래? 사람으로 살래?’라는 잔소리로 청소를 종용하며 걸레를 들면 아들들은 “불치 강박증이야”라고 놀린다.

하긴 살림살이를 지나치게 문지르며 닦는 것도 억압된 성적 욕망의 표현이라는 논리도 있으니까. 사막의 바위 틈에 은거한 초기 기독교시대 ‘사막의 교부’처럼 엄격한 침묵과 소박함을 실천한 헤시카주의(hesychasm)를 마음 깊이 두고 꿈꾸는 내 속내를 그들이 알까.

이나미 정신과 전문의 융 분석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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