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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감각에 맞게 고쳐 쓴 고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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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의 명인 고 정권진 선생님의 판소리 심청가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게 아니면, 명창 김소희 선생님의 춘향가는 어떤가요? 노래를 듣고 부르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빠른 템포의 대중가요의 가사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처럼, 원본 판소리는 무엇보다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혹시 그 어려운 고사성어나 옛말들을 모두 알아들었다 치면 그 내용은 어떤가요? 역시 요즘의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도대체 깊이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하는 어른들 이야기처럼, 판소리의 스토리가 도무지 재미도 없고 깊이도 없다고 하지 않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뻔한 권선징악(勸善懲惡)과 해피엔딩에서 무슨 감동이 있을까요.

그런데 아직도 '춘향전'이 영화로 다시 만들어지고, 그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저 '우리 것이기 때문'이라는 뻔한 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도 뭔가 우리 정서를 자극하는 독특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춘향전'은 바로 그런 생각을 굳히게 하는 무엇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도령이 춘향 옷을 벗기려고 넘놀면서 어룬다. (중략) 춘향의 가는 허리 후리쳐 담쑥 안고 기지개 아드득 켜며 귓불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색 혀를 물고, 순금 장롱에 오색으로 그려놓은 쌍쌍이 오가는 비둘기같이 꾹꿍 끙끙 으흥거리며 뒤로 돌려 담쑥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떨며 저고리, 치마, 바지, 속것까지 활씬 벗겨 놓는다."

현암사에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이라는 시리즈로 낸 4권의 책 중 '춘향전'(김선아 글, 현태준 그림, 현암사 펴냄)의 59쪽에서 옮긴 글입니다. 우리 고전이기 망정이지, 자칫했다가는 음란물 심의에 충분히 걸릴 법한 노골적인 묘사입니다.

이 도령이 춘향이와 함께 '활씬 벗고 업고 놀고 안고 놀면' 된다는 업음질이 시작되는 장면이지요. 여기부터 계속되는 두 청춘 남녀의 농탕질은 이 책에서 여섯 쪽이나 이어집니다. 업음질은 급기야 그 유명한 말놀음에서 마무리됩니다. 물론 말놀음 뒤의 농탕질은 생략됩니다만 여기까지만으로도 그 음탕함은 외설 시비에 휘말린 현대 문학 작품에 결코 못미치지 않습니다.

꼭 음탕함에 있어서만 남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 소절만 더 보지요.

"모든 수령이 도망할 때 거동 보소. (중략) 갓 잃고 밥상 쓰고, 칼집 쥐고 오줌 누니, 부서지는 건 거문고요, 깨지는 건 북 장고다. 본관이 똥을 싸고 멍석 구멍에 새앙쥐 눈뜨듯 하고 안채로 들어가서, '어 추워라.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물 마른다 목 들여라' 음식 담당 아전은 상 잃고 문짝 이고 내달으니 서리 역졸이 달려들어 후닥딱 친다."(이 책 131쪽에서)

'암행어사 출두요' 소리를 듣고 도망치는 탐관오리들의 행색을 그린 장면인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긴박한 현장의 광경을 그대로 보는 듯합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지요. 지금 여기서 모두가 다 아는 우리 고전 '춘향전'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우리 고전이기 때문에 아끼고 사랑하자는 식의 따분함을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시절이 어느 시절이고, 봐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재미도 없고, 뜻도 별 볼일 없지만 우리 것이니 다시 읽어보자고 떠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고전을 그저 스토리 위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강의 스토리만 읽어왔다면 정말 그 안에 담긴 흥미를 알지 못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집니다.

마침 '춘향전'과 함께 '심청전' '홍길동전' '구운몽'이 함께 나왔습니다. 이번에 새로 펴낸 이 시리즈는 특히 어려운 한문 문장을 현대 국어에 맞게 풀어 쓰고, 어려운 고사 성어는 해설을 삽입했습니다. 그밖에도 읽기 어려운 문장들을 현대 맞춤법에 맞게 고쳐 썼기 때문에 읽기 편하게 됐습니다.

이들 고전이 현대에까지 살아남은 것은 단순히 우리 것이기 때문만은 아닌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우리 것이라 하더라도 다시 들춰 볼 가치가 없다면, 아직까지 살아남았겠습니까? 필경 그 안에 숨은 재미를 다시 느껴보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 이 글에서 함께 이야기한 책들

구운몽(김만중 원작, 김선아 글, 김광배 그림)

춘향전(김선아 글, 현태준 그림)

심청전(김성재 글, 김성민 그림)

홍길동전(허균 원작, 김성재 글, 김광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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