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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연인이었던 그녀가 남자? '충격 실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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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연인관계였던 그녀가 실은 남자였다?! 1960년대 중국 공산당 혁명기를 배경으로 프랑스 외교관과 중국 첩보원의 충격적 실화를 소재로 한 데이비드 헨리 황 원작의 ‘M. 버터플라이’가 국내 무대에 올랐다. 88년 초연 당시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우고 토니상 4개 부문을 수상한 문제작이다. 우리에겐 제러미 아이언스, 존 론 주연의 동명 영화(1993)로 기억되지만, 실은 무대가 먼저였다. 충격적 소재와 전복적 패러다임으로 20여 년 전 큰 화제가 됐던 무대를 한국 관객들이 시차를 고스란히 안고 새삼 처음 만나게 된 셈이다.

제목 그대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모티브다. 오랜 세월 ‘희생과 순종’으로 동양 여성의 이미지를 고착화시킨 ‘나비부인’.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86년 법정에 오른 세기의 섹스 스캔들에서 착안한 것은 나만의 ‘버터플라이’를 꿈꾼 한 서양 남성이 욕망의 결과 배신당하고 자결하는 것은, 안됐지만 나비가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통쾌한 전복 스토리’였다. 비슷한 시기 등장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1989)이 현대판 ‘나비부인’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고전적 오페라의 동시대적 해석이 오리엔탈리즘의 전복 vs 계승이라는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난 당시는 공연예술사의 흥미로운 지점으로 보인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동·서양의 고정관념과 오리엔탈리즘 또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위험한 이분법을 적용해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세상이 너무 다양해졌다. 2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을 동양과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거시적 관점보다 개인의 욕망과 환상이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보고 싶은 이유다. ‘나를 속인 건 나의 욕망’이라는 카피가 시사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사극 형식의 원작에 충실한 무대는 남성을 여성으로 믿게 한 짜릿한 극적 환상에 동참하고 싶은 관객의 기대와 충돌해 묘한 엇박자를 낳았다. 이 무대에서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꼈다면 그런 이유다.

무대를 하나의 큰 새장으로 꾸민 것은 ‘버터플라이’의 환상을 놓치고 싶지 않은 르네의 심리이자 감옥에 갇힌 채 죄수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는 르네의 최후를 보여주는 중의적 장치. 관객 또한 공연을 구경하는 죄수가 되어 욕망과 환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해설자이자 주인공인 르네는 1인극을 펼치며 우리를 자신의 환상 속으로 초대한다.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 환상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작품은 르네(김영민)가 송 릴링(김다현·정동화)에게 빠져들게 된 심리를 과거와 대과거, 오페라 ‘나비부인’ 속까지 비약적으로 오가며 보여준다. 유약한 남자 르네는 ‘버터플라이’의 환상을 구축해 가며 자기 확신에 도취된다. 그러나 환상의 실체 ‘버터플라이’에게 영화 속 존 론이 발산했던 기묘한 이질감과 중성적인 아우라는 설정되지 않았다. ‘꽃다현’이라는 애칭의 꽃미남 김다현은 그가 창조해 낼 여성성의 환상에 대한 기대로 객석을 가득 메웠지만, 타고난 미모로 인한 존재감이 리얼한 연기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된 코스프레로 희석되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후반부의 환상을 깨뜨리는 연출이 극적인 것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와닿는다. 남성으로 변신해 당당한 슈트 차림으로 왜소한 체구의 르네 김영민을 압도하는 김다현의 훤칠함은 객석의 탄성을 자아낸다.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 일깨우기 위해 설정된 과도한 남자다움이다. 목소리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며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버터플라이’라는 환상을 산산조각내려는 의도다. 보고 싶은 환상과 외면하고 싶은 진실의 강렬한 대비는 이 무대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행복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하는 인간의 근원적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시청각화한 연출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 무대는 관객에게 깨뜨려야 할 환상을 주지 않았기에 허탈감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수시로 ‘구경꾼’의 위치를 환기시키며 무대를 낯설게 보게 하는 서사극 형식은 관객이 환상을 구축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르네의 환상을 만들어낸 심리구조를 아무런 환상의 도움 없이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무대를 찾는 21세기 관객은 어떤 정치적 담론의 성찰이 아니라 황홀한 환상을 꿈꾼 어떤 이의 욕망과 사랑에 전율하기를 원하지 않을까.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에 20년 동안 속았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관객을 설득하려면, 잠시나마 그 짜릿한 거짓말에 같이 속게 만드는 편이 유효할 듯하다.

실화 속 ‘버나드 브루시코’와 ‘쉬 페이푸’
주베이징 프랑스 대사관 직원 버나드 브루시코는 경극배우 쉬 페이푸를 남장여자로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브루시코의 지인들은 그가 동성애 성향을 숨기는 동성애자였고, 동성애자를 죄악시하는 풍조 속에서 페이푸가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증언했다. 스스로를 여자라고 속이는 남자와 상대방이 여자라고 믿고 싶은 남자의 만남이 견고한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브루시코는 페이푸가 낳았다며 데려온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믿고 양육했고, 중국 정부를 위한 첩보활동에 동참하며 20년간 만남을 이어갔다.

간첩으로 체포돼 재판받는 과정에서 페이푸가 남성으로 판명되자 브루시코는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미수에 그쳤다. 각각 6년형을 선고받고 사면된 이후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페이푸는 유명세를 이용해 서양에서 경극배우로 활동했고, 브루시코는 이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다른 남자들과 교제하며 여생을 보냈다.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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