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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년회 ‘3단계 공세’ 돌입, 사회운동 주도권 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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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26면

서울 견지동 청년회관 터. 현재는 서울중앙교회가 들어서 있다.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은 1920년대 초반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공격해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사진가 권태균]

조선청년회연합회(이하 청년회연합회)는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과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전선이었다. 사회주의 운동 연구가인 이석태가 ‘처음에는 서울청년회 일파 세력이 상대적으로 불리했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방대한 전력이었다(조선청년운동사고(朝鮮靑年運動史考)신천지4호, 1949)’라고 회고한 대로 당초 청년회연합회의 주도권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개량주의 세력이 잡고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⑥사회주의 세력의 공세

김윤식. 민족개량주의자들은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했으나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실패했다.

그래서 서울청년회의 김사국(金思國) 등은 청년회연합회 내부의 민족주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는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청년회연합회 교무부 상임위원 안확(安廓:1886~1946년) 퇴진운동과 김윤식 사회장 반대 운동, 그리고 ‘사기공산당’ 사건이었다.
안확은 서울 성내 서북쪽의 중인(中人)마을인 우대마을 출신이었다. 니혼(日本)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한 인텔리로서 이회영, 이득년, 오상근, 홍증식 등이 추진했던 고종의 망명계획에도 관여한 민족주의자였다. 일본 유학 시절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에도 관여했던 전력으로 청년회연합회 교무부 상임위원이자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을 맡았다.

그런데 안확이 아성(我聲) 제1호(1921년 3월 15일)에 쓴 청년회의 사업이란 글이 문제가 되었다. 안확은 이 글에서 “사업보다도 수양 목적이 큰 주안이 되리니……우리 청년회의 사업이란 것도 수양적 사업을 주로 할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것이 청년회연합회를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추진하는 정치단체로 이끌려는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을 샀다.
1921년 4월 1일부터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청년회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두 파는 충돌했다. 김사국 등은 안확이 개인 저서인 자각론(自覺論)개조론(改造論) 등을 청년회연합회 명의로 발간한 것을 비판하면서 사임을 요구했다. 형식은 개인 자격의 저서를 청년회연합회 명의로 발간한 것에 대한 비판이지만 내용은 개조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1년 후인 1922년 5월 개벽(開闢)제23호(1922년 5월)에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게재하면서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無上)한 영광으로 알며…”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안확의 개조론이 1년 더 빠른 것이었다. 김사국을 겨냥한 비판에 대해 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 오상근과 장덕수가 안확을 옹호하고 나섰지만 결국 안확은 교무부 상임위원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안확. 일제 식민사학에 맞서 역사와 국어·음악 등의 주체성을 세우려 노력한 국학자였다.

이 사건 직후인 1921년 7월 12일 김사국은 경성고학생 갈돕 순회강연단의 강사로 개성에서 실력론의 오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실력양성론이나 민족개조론은 모두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이론이었고, 김사국은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이 이론의 모순에 대해 숙지했다.<‘새 사상이 들어오다②사회주의 단체 조직’ 참조>
그는 이날 강연에서 “뒷사람이 앞으로 나가면(推進) 앞선 자는 더 앞으로 나가는 것(更進)이 이치상 당연하므로 실력양성론으로는 결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사국이 실력양성론의 대안을 이야기하려 할 때 임석 경관이 제지하는 바람에 연설은 중단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두 번째 공세는 김윤식(金允植:1835~1922) 사회장 반대 사건이었다. 1922년 1월 21일 운양(雲養) 김윤식이 87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동아일보는 23일자에 “운양 선생의 장서(長逝)를 도(悼)하노라-조선의 문장, 사회의 원로-”라는 장문의 1면 사설로 애도했다. 김윤식은 동아일보 창간 축하 휘호를 썼고 동아일보도 ‘폐호한거(閉戶閑居:문을 닫고 한가하게 거함)하는 운양로인(雲養老人)’이란 기사를 실을 정도로 우대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기 석 달 전인 1910년 5월 하지메 호소이(細井肇)가 쓴 한성의 풍운과 명사(漢城の風雲と名士는 김윤식을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일본당(日本黨)의 영수(領袖)”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강제합병 직후인 그해 12월 도모유키(大村友之丞)가 편찬하고 조선총독부 인쇄국에서 발간한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에 따르면 김윤식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은 데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었다.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던 김윤식이 일약 동아일보의 후견인으로까지 등장하는 것은 3·1운동 때의 처신 때문이었다. 3·1운동 때 이완용이 자제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과 대조적으로 김윤식은 을사조약 때 분사(憤死)한 조병세(趙秉世)의 사위 이용직(李容稙)과 함께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때문에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형 선고를 받고 집행유예됨으로써 일약 민족주의 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초대 사장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청년회연합회 위원장 오상근과 장덕수 등도 실행위원으로 들어갔다. 100여 명에 달하는 운양선생 사회장 위원들까지 선임하다가 사회주의 세력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제동이 걸렸다. 조선노동공제회와 무산자동지회 등은 물론 조선학생대회, 고학생구제회 등이 일제히 반대했다. 무산자동지회는 ‘김윤식씨가 사회의 신망하는 이상적 인물이 아닐뿐더러 주최 측에서 사전 동의도 없이 각 계급 인사들의 성명을 신문지상에 발표했다’고 비판했으며, 서울청년회의 김한은 무산자동지회 명의로 조선일보(1922년 2월 3일)에 “귀족사회를 매장하자! 자본주의적 계급을 타파하자! 명사벌(名士閥)을 박멸하자! 사회개량가를 매장하자”고까지 주장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결국 장례위원회는 1922년 3월 1일 청진동 중앙구락부에서 회의를 열고 상주(喪主)가 ‘사회장을 사양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명분으로 사회장을 취소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는 발행부수가 크게 떨어지는 타격을 받았고, 아울러 민족주의 세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배성룡은 이를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격렬한 여론투쟁’이라면서 “확실히 조선에서 처음 있게 된 일대 도전, 즉 귀족계급 양반벌(兩班閥) 또는 장래에 사회에서 우월한 계급의 지위를 점령하려고 몽상하는 자들과 저 민중 본위의 평등한 사회를 이상하는 자들과의 큰 도전이었다(조선사회운동 소사, 1929)”라고 평가했다. 이 사건은 사회 갈등이 계급투쟁 단계로 한발 더 나아갔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서울청년회는 이 사건 직후인 1922년 4월 열린 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 사건’을 제기함으로써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 자금, 이른바 레닌 자금을 국내 공산주의 운동과는 관계없는 국내 인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재무위원 김철수는 오상근, 최팔용, 장덕수 등 9명의 사회혁명당 당원에게 코민테른 자금을 제공했는데, 배성룡은 “혹 4만원, 혹 8만원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일제 수사 자료에는 8만원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거액이었다. 이 자금은 청년회연합회의 영남· 호서 지역 순회강연 경비로 일부 지출되었고, 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의 발간 경비로도 사용되었다.

자금을 수령했던 인물들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 조직인 사회혁명당 당원들이기 때문에 수령 계통으로 따지면 큰 문제는 없었지만 사회혁명당 자체가 비밀조직인 데다 배성룡이 앞의 글에서 “적지 않은 금전을 재료로 삼아 각 개인 각자의 세력을 부식하기에 급급해 그 경쟁이 격렬했고 요리점 출입과 자동차 타기에 눈코 뜰 새가 없다는 세인의 비난이 자심(滋甚)했다”는 말처럼 공사(公私)가 뒤섞이면서 큰 물의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서울청년회와 청년회연합회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깔려 있었다. 제3회 대회에서 장덕수는 청년회연합회를 대표해 “조선에는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면서 “민족의 잠재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은 “혁명적 투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소비에트 권력의 원칙에 따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제명 요구가 청년회연합회에서 부결되자 서울청년회는 평산(황해도), 함흥(함경도), 김해(경상도)청년회 등 8개 지방 청년단체들과 함께 청년회연합회를 탈퇴했다. 또한 사건 관련자들인 장덕수·오상근·최팔용·김명식·이봉수를 서울청년회에서 제명했다. 1922년 4월 서울청년회는 이사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는데, 이때 김사국과 1919년 4월의 국민대회를 주도했던 장채극이 집행위원으로 선임된다.

안확 퇴진 운동, 김윤식 사회장 반대 운동, 사기공산당 사건 등을 거치면서 서울청년회는 그간 국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한국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이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진정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싸워야 할 또 다른 상대가 있었다. 바로 코민테른 파견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