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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표 2000번까지 … 저축은행 4곳서 3000억 뱅크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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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부실 저축은행 추가 퇴출이 주말에 결정된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 강남의 한 저축은행 고객들이 예금을 찾기 위해 4일 아침부터 몰려들었다. 10시46분 현재 858번째로 뽑은 대기표에 대기인 수가 780명을 기록했다. 이날 예금자들의 불안으로 인해 건실한 저축은행까지 인출사태를 빚었다. [뉴스1]

4일 오전 9시 서울 대치동 솔로몬저축은행 본점은 문을 열자마자 예금을 찾으러온 200여 명의 고객으로 가득 찼다. 대기번호는 순식간에 300번을 넘어섰고, 자리를 잡지 못한 100여 명의 고객이 지점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10여 명의 직원이 직접 객장에 나와 “아직 영업정지 여부는 최종 결정되지 않았으며 예금자 보호법에 따라 5000만원까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오전 7시에 달려왔다는 김모(77)씨는 “5000만원 이하는 예금자 보호 대상이라고 하지만, 그 돈을 손에 쥘 때까지 마음 졸이며 살 수 없다”며 3600만원의 정기예금을 중도해지하고 돌아갔다.

 오후 3시 대기번호는 2000번을 넘어섰다. 저축은행에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고객은 400명 정도”라고 공지하자 고성이 터져나왔다. 60대의 한 남성은 “400명만 처리해준다는 근거가 뭐냐. 밤을 새워서라도 돈을 내줘라”고 핏대를 세웠다.

 영업정지 대상에 포함됐다는 소문이 도는 다른 저축은행도 사정이 같았다. 저축은행 측이 예금자보호제도 안내문을 입구에 붙이고 고객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예금을 찾으려는 발길이 마감 이후까지 이어졌다. 번호표가 일찌감치 동난 일부 저축은행은 ‘하루 200명까지만 인출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내걸기도 했다. 서울 을지로 H저축은행 본점은 번호표 발급기가 고장이 나 직원들이 손으로 번호를 매겨 대기표를 나눠주기도 했다.

 퇴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저축은행 네 곳에선 이날 하루 평소보다 20배가량 많은 3000억원 정도의 예금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산됐다.

 혼란은 영업정지 대상이 아닌 저축은행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서울 청담동 현대스위스저축은행 본점엔 이날 오전에만 평소의 5배가 넘는 400명가량의 고객이 다녀갔다. 이 저축은행은 홈페이지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영업정지 대상이 아니다’라는 공지를 띄웠다. 영업추진부장이 직접 나서 “옆집에 불이 났는데 불똥이 튄 격이다. 각서를 써줄 테니 믿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인출 행렬을 막지 못했다.

 냉정을 잃지 않는 고객들도 눈에 띄었다. 지난해 두 차례 영업정지 사태를 겪으며 ‘5000만원 이하는 안전하다’는 걸 경험한 사람들이다. 압구정동에 사는 주부 박연희(54)씨는 “결국 어딘가로 인수되면 원금은 물론 약정된 금리를 받을 수 있더라”며 “아직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예금은 그냥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불안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예금보험공사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예금자가 저축은행에 맡긴 예금은 어떠한 경우라도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원금과 소정의 이자를 합해 1인당 최고 5000만원까지 보호된다”며 “막연한 불안감에 예금을 중도해지할 경우 이에 따른 이자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니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예보에 따르면 연 이율 5.5%인 1년짜리 정기예금을 중도에 해약하면 연 1.5% 안팎인 중도해지 이율을 적용받는다. 정기예금 4500만원을 중도해지하면 이자 손실이 약 180만원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이날 금융발전심의위원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중도 인출은 오히려 예금자에게 손실이 될 수 있으니 부화뇌동 말고 기다려 달라”고 강조했다.

 저축은행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대형사 3곳과 지방사 1곳 등 4개사가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며 “그러나 감독당국의 최종적인 판단과 계열사의 유동성 확보 정도에 따라 문을 닫는 저축은행 숫자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증시에선 솔로몬저축은행·한국저축은행·진흥저축은행 등 주요 저축은행주들이 장 시작과 함께 하한가로 추락했다.

김혜미 기자

영업정지 앞두고 인출액 20배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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