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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반품불가 교환불가 환불불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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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택
시인

며칠 전 대형마트에 갔더니 반값 할인과 원플러스원 상품들이 더 늘어난 것 같다. 상징적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미끼상품이 아니다. 아예 다른 곳으로 갈 엄두를 못 내도록 할인폭은 파격적이고 행사 품목은 다양하다.

이렇게 팔고도 이익이 나는지 의아하다. 갈 때마다 쪽지에 적은 물건을 사러 왔던 생각은 없어지고 쇼핑 카트는 더 얹을 틈도 없이 수북해지곤 한다. 양질의 상품을 싸게 샀다는 기분 때문에, 돈 버는 쇼핑을 했다는 만족감 때문에 부자가 된 느낌이 들곤 한다. 거저나 다름없는 것 같은 물건들을 잔뜩 짊어지고 집에 올 때는 즐겁다. 그러나 즐거움은 딱 거기까지.

 그 다음부터는 밀어내기다. 음식은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먹어 치워야 한다. 변질돼서 버리면 아까우니까 공격적으로 먹어서 없애야 한다. 변질 직전에는 맛이 떨어지니까, 아내와 아이는 먹어 치우는 데 소극적이니까 내 앞에는 청소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이 쌓인다. 먹는다기보다 입과 위장에다 버린다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아까운 것들이 쓰레기통으로 가지 않도록 입과 위장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밀어내기는 더 있다. 지난번에 산 것 위에 새로 산 것을 얹어 놓고 또 새것을 얹어 놓아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라 사방을 헤집으며 찾기. 못 찾으면 또 사기. “아니, 이것과 비슷한 게 있는데 왜 또 샀어?” “내가 전에 사다 놓은 걸 여기다 잘 정리해 놨잖아. 그런데 왜 또 샀어?” “너무 많아서 정신없는데 제발 쓸 것과 안 쓸 것을 구분해 좀 버리라고!” 등의 악다구니하기.

 그래서 서둘러 할 일이 생긴다. 비슷비슷한 것들이 쌓여 있는 창고와 수납장을 정리하는 일. 사다 놓고 한 번도 안 쓴 것을 골라 재활용 수거함에 버리는 일. 기능이나 디자인이 향상된 신제품이 나왔다고, 전에 산 것은 불편하거나 촌스러워서 못 쓰겠다고 구형 제품을 남 주거나 버리는 일. 그 일들을 위해 집 안을 온통 들쑤신 다음 대청소하는 일. 물건 버릴 때마다 양심이 조금은 뜨끔하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일.

 너도나도 대형마트로 몰려가니 최근에는 강제 휴무일까지 생겼다. 위축되는 재래시장과 골목 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란다. 억지로 문을 닫게 한다고 해서 대형마트로 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 있을까? 십여 년 전 기업형 대형마트가 우리 동네까지 왔을 때, 처음 체험해 본 쇼핑은 놀라웠다. 주차 편의나 쾌적한 공간은 물론이고, 상품마다 붙은 가격표에다 할인 상품도 많아서 흥정할 필요도 없이 편하고 싸게 살 수 있었다. 물건 값 깎을 줄 모르고 좋은 상품 고르는 안목도 없던 나에게 그 쇼핑은 일이 아니라 놀이고 휴식이었다. 물건 몇 번 만져봤다고 주인 눈치 보며 억지로 살 필요도 없었다. 살 때는 싱싱했는데 집에 와서 상한 물건으로 몰래 바꿔치기 된 걸 보고 화내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편하고 즐거운 쇼핑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일까? 조금 전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던 물건이 보는 순간 갑자기 간절히 필요해진다. 안 사고 지나가면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사놓고 본다. 물건 살 때만 잠깐 즐겁지 그런 물건은 한두 번 쓰고 잘 모셔뒀다가 버리기 일쑤다. 집과 몸과 마음은 꼭 필요하지 않은 잡동사니로 채워진다. 물건이 넘치다 보니 눈 좀 쉬려 하면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이 가로막고, 숨 좀 쉬려 하면 음식이 식도와 숨구멍을 가로막는다. 마음이 가난해질 틈이 없다. 물건으로 가득 찬 몸과 마음에는 꿈과 상상력과 여유와 이타적인 배려가 들어설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0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는 흡연율과 음주율, 나트륨 섭취량, 에너지 지방 과잉 섭취량 등이 대부분 전년보다 증가했다고 한다. 성인 비만율도 증가하고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도 증가 추세라고 한다. 한마디로 더 먹고 더 마시고 더 피우고 덜 움직였다는 것이다. 내 욕망이 시키는 일이니 대형마트나 광고나 기업 탓만 할 수는 없다. 더 채우고 싶은 몸과 마음을 절제하고 비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잘못 산 물건이야 교환하고 반품하고 환불할 수 있지만, 하나뿐인 나의 삶은 반품불가, 교환불가, 환불불가이므로.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