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 포럼

한국류 vs 일본 미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일본 바둑은 무적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저 변방의 한국 바둑에 의해 무참히 무너진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이 만든 3만여 개의 정석을 교리처럼 받아들였다. 일본 바둑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미학(美學)'으로 상징되는 고상한 일본 바둑은 '한국류'라 불리는 하류(?)의 수법에 의해 초토화된다. 마치 몽골이 만리장성을 넘듯 일거에 쓸어버린다.

93년,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응씨배 세계선수권 결승전에서 한국의 서봉수9단과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9단이 맞붙었다. 서봉수는 저잣거리에서 바둑을 배워 온갖 때묻은 수법을 익힌 잡초류의 대가. 오타케는 "바둑을 질지언정 추한 수는 둘 수 없다"는 일본 미학의 상징이다. 승부는 2 대 2가 됐고 우승컵을 가리는 최종국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형세는 오타케의 절대 우세로 흘러갔고 서봉수는 점점 더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벼랑 끝에 몰린 서봉수가 만신창이의 몸을 일으켜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 사즉생(死卽生)의 기세에 오타케가 귀신에 홀린 듯 실족을 거듭하더니 대마를 죽이고 만다. 바둑은 간발의 차이로 역전됐다.

그 승리는 분명 운이었다. 동시에 막을 수 없는 기세였으며 거칠 것 없는 생명력이었다. 중국이 붙여준 '한국류'란 단어는 처음엔 사납고 세련되지 않은 수법, 진흙탕에서 뒹구는 추한 수라도 거침없이 사용하는 실전 위주의 치열한 수법을 의미했다. 바둑의 본질은 능률이며 능률적인 것은 아름답고 비능률적인 것은 추하다는 오랜 전통의 일본 미학과 철저히 대비되는 표현이었다.

하나 사람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바둑판이란 전쟁터에서 미추(美醜)의 개념은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좁히는 족쇄일 뿐이라는 것을.

한국이 일본을 곧장 실력으로 압도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이창호9단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의 초창기 세계 대회 우승은 기적으로 점철되었다. 조훈현9단은 마치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결코 죽지않는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그는 기적 같은 역전승이 너무 많아 '귀신이 돕는 조훈현'이란 별명마저 얻었다. 이런 승리들이 하도 신기해 '혹시 한국에 대운이 돌아와 그 덕을 보는 것일까' 하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그러나 한국 바둑이 세계를 제패한 원동력은 특유의 생명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미학이 순풍에선 강하지만 위기에서 허약한 반면 야생의 한국류는 위기에 봉착할수록 강인한 생명력을 토해냈고 그것이 기적의 승리로 이어졌던 것이다.

일본 바둑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으켜 세웠다(이에야스는 일본 기원의 명예의 전당에 첫 번째로 헌정됐다). 일본엔 조선의 고수 이약사가 초대 본인방 산샤(算砂)에게 3점 접히고 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모두 400여 년 전 일이다.

그로부터 욱일승천해 온 일본 바둑은 80년대 초반 절정기에 오르더니 곧 한국에 꺾였다.

독도 파동을 보면서 한국류에 패배한 일본 미학을 생각한다. 일본 미학은 스스로 행동반경을 좁힘으로써 패배의 길을 걸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과거사의 족쇄를 털어내지 못하고 이를 미화하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스스로의 행동반경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잘 짜인 틀은 아름답다. 그러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 강하다. 한국류가 세계 바둑을 지배하게 된 사연이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