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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닥치고 안전’과 ‘닥치고 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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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또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미국 광우병이 도지면서 이명박 정부의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선 양국 공무원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이다. 유난히 돋보이는 쪽은 미국의 웬디 커틀러 무역대표부(USTR) 대표보다. 그녀는 프로였다. 광우병이 또 발생할 수 있고, 한국이 수입을 금지할지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미리 읽었다. 한승수 국무총리의 담화문(국민 건강이 위협받으면 수입금지)은 인정하되 한국 정부의 광고(광우병 발생=수입금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23년간 통상 협상을 다룬 전문가의 솜씨가 묻어난다. 그녀는 미국 국익을 지켰다.

 한국은 콩가루 집안이다. 당시 협상 주인공들은 삼인삼색(三人三色)이다.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약속대로 쇠고기 수입을 중단시키라”고 주장했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농식품부와 보건복지부에 물어보라”며 “정부 광고는 에러(실수)”라고 발뺌했다. 민동석 협상 수석대표는 2010년 자서전에서 “광우병이 재발해도 쇠고기 수입을 중단할 수 없다”며 뒤늦게 고백했다. 한마디로 아찔하다. 미국 광우병보다 이런 ‘영혼 없는 정부’가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한다.

 청와대는 “광고 문구는 생략되고 축약되기 마련”이라며 “총리 담화문을 보라”고 주문했다. 궁색한 변명이다. 앞으로 우리는 정부 광고와 담화문을 샅샅이 대조해야 하는 피곤한 신세가 됐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해명에 앞서 잘못된 광고부터 사과하는 게 올바른 순서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표시·광고법’은 소비자를 오인하게 만드는 모든 허위·과장 광고가 처벌 대상이다. 위반하면 2년 이하 징역이나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굳이 소비자가 오인에 이르지 않아도, 오인할 위험성만 있어도 처벌한 법원 판례가 수북이 쌓여 있다.

 광우병 파문에서 안전(安全)과 안심(安心)은 구분해야 한다. 사실 과학적으로 미국 쇠고기의 안전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 세계가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4년 전 ‘뇌 송송 구멍 탁’의 허무한 괴담들이 남긴 학습효과도 생생하다. 따라서 ‘닥치고 촛불!’만 외치는 반미 진영에 고개를 끄덕이긴 어렵다. 하지만 ‘닥치고 안전’이라며 압박하는 정부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만 우기고, 우리 소비자의 안심은 내팽개친 분위기다. 온 국민을 상대로 “불안하면 먹지 마”라며 구박하는 느낌이다.

 아마 우리 사회의 보편적 정서는 ‘닥치고 촛불’과 ‘닥치고 안전’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언론에 등장한 평범한 가정주부들의 넋두리가 가슴을 찌른다. “정부는 괜찮다 하지만 믿을 수 없고, 워낙 속여 파는 곳도 많아 아이를 둔 입장에서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러니 미국산 쇠고기 판매가 반 토막 난다. 불안해진 소비자의 자기보호 본능에 따라 냉엄한 시장원리가 작동한 것이다. 그만큼 국민의 마음은 지금 많이 상해 있다. 협상 주역들은 개그컨서트의 ‘고음불가’를 능가하는 불협화음을 내고, 미국은 “아무 조처도 하지 않는 한국이 고맙다”며 속을 긁어대고 있다. “마트보다 못한 정부” “태국·인도네시아보다 못한 나라”라는 볼멘소리가 결코 과민반응이라 할 수 없다. 누구라도 심기가 뒤틀리게 돼 있다.

 지난 토·일요일에도 청와대는 비상근무를 하며 고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내부 마찰은 두렵지 않고, 대미 통상 마찰만 겁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야당은 수입금지, 새누리당 주류는 검역 중단 쪽으로 기울어진 지 오래다. 청와대가 쇠고집을 부릴수록 고립을 자초할 것 같다. 해법이 궁금하다면 길거리의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된다. 대개 “검역이라도 중단하고 안전성을 충분히 확인한 뒤 문을 열자”고 할 것이다. 미국만 나오면 촛불부터 찾는 반미 진영도 한심하고, 미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정부도 피곤하다. 점잖은 체면에 ‘나꼼수’처럼 막말은 할 수 없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명한 어록에 빗대 글을 맺는다. “이제 지겨워 국민도 못해먹을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