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오랜 지인을 경계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오정소는 YS정부 시절 잘나가던 정보맨이다. 안기부 내 도청 조직인 ‘미림팀’을 만들도록 했다니 보고 들은 게 많을 터다. 그가 2009년 초 사석에서 정치인의 금품 수수 속성을 두 가지로 요약한 적이 있다.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란 ‘문고리 권력’으로 남다른 축재(蓄財) 실력을 보여준 장학로 케이스를 예로 들면서다.

 첫째, ‘새로 사귄 사람이 돈을 건네는 게 아니다’란 거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건네는 한두 푼이 쌓여 사건화된다는 의미다. 둘째, ‘이문(利文)’ 없는데 돈을 안 쓴다’는 거다. 누군가 돈을 건넨다면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서라는 뜻이다. 대가성 없는 돈은 궁극적으론 불성립한다는 얘기다. 지인(知人)이 브로커로, 용돈이나 명절 떡값이 뇌물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다는 경고다.

 오정소 본인도 몇 차례 구설에 오른 걸 보면 이론과 실천은 확실히 별개다. 그럼에도 그의 말이 자주 떠오르는 건 ‘서초동’을 향해 줄지어가는 현 정부 인사들 때문이다. 마치 번호표라도 뽑고 기다린 양 검찰에 출두하는 이들을 보며 ‘오정소 법칙’이 2012년에도 유효하다는 걸 깨닫곤 한다. 당장 오늘 검찰에 출두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개인적 입장에서 중학교 후배가 ‘형님 보태 쓰십시오’라고 해서 받았다”고 말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나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도 금품 수수에 대해 오랜 친분 있는 인사의 부조(扶助)란 취지로 해명했다.

 불과 5, 6년 전의 이들에게선 상상하기 어려운 오늘이다. 2008년 초 최 전 위원장은 ‘노절난(老節難·사람이 늙어 절개를 지키지 못하면 어려움과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을 입에 올린 일이 있다. “은둔 중인 해위 윤보선 선생이 사회 참여 요청이 쇄도해 괴롭다고 하더라”고 하자 한 원로 정치인이 해준 말이라고 한다. 정치인은 그러곤 “자네도 잘 유념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최 전 위원장은 그 일화를 전하곤 “얼마 전 손주들과 휴가 가려다 특정 기업과 관련 있는 곳이란 말이 나올 수 있어서 취소했다”고 했다. 극히 몸조심한다는 걸 에둘러 얘기한 거다.

 ‘형님’ 이상득 의원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노건평씨 얘기를 하며 “나도 잘못하면 2, 3년은 그냥 갈지 넘어갈지 모르지만 4, 5년 지나면 다 드러난다는 거 안다. 그래서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또 “절대 예전부터 아는 사람 아니면 안 만난다”는 말도 했다. 권부(權府)에 있는 대부분 인사도 비슷한 마음가짐이었을 거다. 과거 정부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애초부터 문제 소지가 큰 사람들이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착한 사람은 좋은 일만 하고 못된 사람은 나쁜 일만 한다’는 믿음은 도덕적 안도감을 줄지언정 잘못된 신념일 가능성이 크다. ‘진즉 문제가 생길 줄 알았다’고 하는 것도 사후 확신일 때가 많을 거다. 현재 서초동을 향한다고, 과거 이들의 진심까지 의심할 이유는 없다. 노력했을 거다. 그러나 어딘가에서부터 선을 넘었고,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거나 자각했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보는 게 현실적 진단일 거다.

 그 어딘가는 어딜까. 심리학자 대니얼 카니먼은 “익숙하게 느낀 걸 진실로 느끼고 좋다고 느낀다. 낯익음과 진실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믿게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거짓말을 정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생각에 대한 생각』)이라고도 했다. 20년 지기이니까, 호형호제한 사이니까, 늘 듣던 말이니까 방심하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뜻일 게다. 돈의 성격을 망각하는 일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도리 외엔 없겠다.

 “평소엔 그와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부귀할 때는 그와 왕래하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한 상황에서는 그가 하지 않은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는 그가 취하지 않은 것을 살펴라.” 2500년 전 이극이 위의 문후에게 알려줬다는 인물 감정법이다. 지금도 유념할 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