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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희망을 … 베트남·필리핀에 병원, 몽골선 주거 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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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그곳엔 한국만의 경험과 노하우가 녹아 있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시킨 세계 유일의 개발·발전 소프트파워가 뿌리를 내렸다. 그곳엔 정(情)과 열정이 어우러져 있었다. 이를 세계 굴지의 한국 기술이 뒷받침해주었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해외 무상원조 현장은 또 다른 기적을 꿈꾸면서 상생(相生)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베트남·필리핀·네팔·몽골·파라과이의 한국형 원조 모델을 다녀왔다. 현지 밀착 한국형 원조 모델을 ‘친구야(chinguya)’라는 이름 아래 4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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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식 의료서비스로 서민에게 ‘희망’을

파라과이 청소년재활원

 지난 2월 2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베트남 중부지역 종합병원’ 공사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이 2006년부터 3500만 달러를 투입한 병원의 마감 공사가 한창이었다. 개원 예정일은 올 6월 말~7월 초. 규모는 지상 7층에 500병상이다. 베트남 중부에 자리 잡을 최신식 허브 병원이다. 코이카의 옥이호 병원건립사업단장은 “이 병원은 꽝남성을 비롯한 주변 7개 성 기층 주민의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라며 “과거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집중적으로 파견됐던 베트남 중부지역의 일부 반한 감정 해소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의 기대도 컸다. 탄쩡롱 병원장은 “꽝남성의 경우 주민 25%가 다른 지역에서 진료를 받고 있지만, 새 병원이 들어서면 그들도 코이카 병원을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 코이카 베트남 사무소장은 “이 병원 건립은 한국 정부의 무상원조로 추진되는 협력사업 중 최대 규모로, 코이카의 역사를 새로 쓰는 사업”이라며 “현지 주민의 건강 증진 외에 한국의 국격(國格) 제고에도 기여하는 만큼 가장 좋은 자재와 장비를 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보건은 코이카의 무상원조 사업 중에서도 주력 분야다. 영아 사망률과 출산 중 사망률을 낮추는 것은 인권의 기초일 뿐 아니라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저소득층에 ‘희망’을 심어주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같은 달 6일 필리핀 카비테주에 있는 한국·필리핀 친선병원. 코이카가 지원한 신생아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은 덕분에 살아남은 사내아이 리처드를 만날 수 있었다. 산모 캐서린 팔마(29)는 “탯줄을 목에 감고 태어나 가래가 차고 자가 호흡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아들을 잃는 줄만 알았는데, 집중치료를 받고 폐와 기관지 기능을 완전히 회복해 한 달 만에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영아 사망률은 출산아 1000명당 25명이다. 2015년까지 19명으로 낮추는 것이 필리핀의 목표다. 코이카는 이를 위해 1999~2001년 380만 달러를 들여 100병상 규모의 ‘한·필병원’을 건립했다. 2010년부터는 공중보건센터 신축을 위해 3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필리핀 보건부는 각국의 원조 사업을 평가하면서 필리핀의 제도와 기관을 이용해 원조하는지 같은 ‘주인의식’ 존중 여부 등 16개 지표로 평가하고 있다. 코이카는 최근 11개 항목에서 표준 이상의 목표를 달성해 좋은 성적을 받았다. 세실리아 프란시스코(64) 한·필병원장은 “한국과 필리핀은 식민지 지배와 민주화 달성 등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한국이 어려운 시절을 경험했기 때문에 원조 효과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네팔 의료보험 시범사업

 양질의 의료서비스는 ‘의료 빈부격차’ 해소에도 기여한다.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 있는 비야 엘리사 모자보건병원은 원래 보건소 규모였다가 2010년 코이카 지원으로 증축했다. 파라과이에는 우리 식 건강의료보험 체계가 없다. 소수 부유층은 사립 의료기관을 이용한다. 반면 국민의 약 70%(저소득층)는 공공 의료기관의 신세를 진다. 비야 엘리사 병원은 후자에 속하며 인근 7만 명 정도가 이용한다. 이곳에선 특히 앳된 얼굴의 10대 산모를 많이 볼 수 있다. 파라과이의 10대 출산율(15~19세 사이 여성 1000명이 출산하는 아이 숫자)은 2009년 기준 70명으로 같은 해 한국의 4명에 비해 훨씬 높다.

 에스페란자 마르티네스 보건의료부 장관은 “파라과이는 전체 인구의 47%가 18세 미만인 젊은 나라로, 국가 보건정책에서 모성 및 아동 사망률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며 “비야 엘리사를 비롯해 코이카가 지원한 현대식 병원 3곳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비야 엘리사 병원 정형외과에 파견 중인 정종훈 협력의사는 “파라과이는 빈부격차가 심해 서민은 한 달치 월급을 내야 치료받을 수 있는 경우도 허다한데, 여기선 서민도 최신식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 SOS 요청사업부터 손길 내밀어

 ‘젊은 나라’ 파라과이의 고민은 ‘길거리 청소년’이다. 파라과이의 길거리 아동은 약 1만5000명으로 추산된다. 국가 전체의 신생아 출생 미신고율이 44%(2006년)에 이르는 걸 감안하면 길거리 청소년은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빈민층 청소년 약 120만 명이 이런 위험에 노출돼 있다. 길거리를 떠돌며 마약에 빠져들거나 소매치기·강도짓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순시온 인근에 있는 ‘예미트 취약 아동·청소년 재활훈련원’은 길거리 청소년을 재활하고 보호하는 곳이다. 정부에서 길거리 청소년 보호를 위해 시행 중인 쉼터 프로그램 ‘파이낙(PAINAC)’에 한국 복지사들의 전문성을 더했다. 이곳에선 아이들이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게 돕는 한편 각자의 꿈과 소질을 키워주는 데 힘쓴다. 호르헤 아마리야 원장은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과 교육과정 등 인프라 자체가 코이카가 기여해준 성과”라고 했다. 엄마가 숨지고 아빠가 감옥에 간 사이 거리를 떠돌았던 타냐(14)는 이곳에서 2년을 지내면서 이제 “미용사나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코이카는 의료 및 교육 등 ‘응급조치’가 끝나면 주거환경을 한국 기술력으로 개선해주는 데 앞장선다.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이 6개월 동안 이어지는 몽골. 인구 300만 명 가운데 40%가 수도 울란바토르에 살고, 그중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한다. 그런데 다들 고층에 살기를 꺼린다. 밤 11시 이후에는 고층에서 물을 사용할 수 없고, 수압이 높아져 배관이 터지는 사고도 종종 발생해서다.

 90년대 몽골에 의료·교육을 지원했던 코이카는 2008년부터 주거 개선 사업에 착수했다. 2년 동안 500만 달러를 투입해 아파트 냉·온수 펌프와 열 교환기 교체 사업을 완료했다. 울란바토르 시내의 121개 펌프장 가운데 44개 시설에 대한 리모델링도 마쳤다. 울란바토르 공공시설관리청 다시제외그 청장은 “한국의 신식 시스템은 사용량에 따라 작동하는 훌륭한 메커니즘”이라며 “에너지 효율도 20%나 높아졌다”고 말했다.

 아예 ‘소프트웨어’ 자체를 이식하기도 한다. 코이카는 네팔의 티미·박타푸르·무구 등 6개 지역에서 의료보험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 돈으로 월 7000원 정도의 보험료를 내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80% 정도의 병원비를 보험조합이 내주는 식이다. 의료보험 프로젝트 책임자인 김화준(예방의학) 전문의는 “돈 몇 푼이 없어 수술을 못 받고 꼼짝없이 병을 키우는 환자에게는 희망의 빛줄기 같은 사업”이라고 말했다.

 네팔 정부 국가개발위원(장관급)인 시바 쿠마르 마이 박사는 “그동안 미국·일본·영국 등 선진국이 많은 원조를 했지만 개도국 입장에서 필요한 ‘맞춤형 지원’이 없었다”며 “네팔보다 더한 가난을 이겨낸 ‘선배 국가’인 한국의 원조는 네팔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의식도 심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오영환(베트남)·강혜란(파라과이)·유지혜(필리핀)·이현택(네팔)·민경원(몽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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