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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 "김일성이 날 일으켰다고 세뇌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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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예쁘지 않은 사진도 찍어보자”는 요청에 배두나는 “나도 그런 사진이 더 좋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배우가 신비주의로 가다 보면 거품과 환상이 생길 수 있다”며 “대중이 궁금한 점을 늘 적당히 남겨놓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래서 친구에게도 다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름 40㎜, 무게 2.7g의 탁구공이 한반도 전체를 뒤흔든 때가 있었다.

 1991년 4월 일본 지바(千葉)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사상 처음 남북 단일팀을 이룬 코리아팀은 여자단체전에서 대회 9연패를 노리던 중국을 꺾고 우승했다. 그때의 감격을 재현한 영화 ‘코리아’(문현성 감독)가 다음 달 3일 찾아온다.

 당시 승리의 주역은 남(南)의 현정화와 북(北)의 이분희 선수. ‘해운대’와 ‘괴물’로 각각 1000만 관객 신화를 이룬 하지원(34)과 배두나(33)가 그들을 연기했다.

 하지원은 현정화 감독(한국 마사회)이 직접 지도해줬지만, 배두나는 북에 있는 이분희를 만날 수 없어 홀로 캐릭터를 만들어가야 했다. 그런 핸디캡에도 배두나는 이분희의 포커페이스 속에 감춰진 독기와 카리스마를 끌어냈다.

 2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이분희가 꿈에 나올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했다”고 했다.

 - 이분희 캐스팅에 응한 이유는.

 “투자 과정에서 현정화의 비중이 커졌지만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이분희의 역할이 강하고 매력적이었다. 상상하며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끌렸다.”

 - 이분희를 어떻게 연구했나.

 “가진 것은 시나리오와 사진뿐이었다. 현 감독은 ‘이분희가 도도했다’고만 했다. 북한말 선생님은 이분희가 김일성 생일날짜가 박힌 차 번호판을 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계급의 수직상승이었다. 김일성 수령이 나(이분희)와 집안을 일으켜줬다고 스스로 세뇌했다. 이런 것도 국가보안법 위반인가?”(웃음)

이분희(배두나·왼쪽)와 현정화(하지원)가 복식조로 나서 중국과 결승전을 치르고 있다.

 - 탁구 장면이 힘들지 않았나.

 “초등학교 때 탁구를 배운 게 도움이 됐다. 난 오른손 팬홀더인데 이분희의 왼손 세이크핸드를 따라 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발톱도 빠지고, 어깨에 무리도 갔지만 대역 없이 소화해냈다. 한여름 실내온도가 50도까지 올라간 안동체육관에서 서너 양동이 분량의 땀을 흘렸다.”

 - 연기에 만족하나.

 “최근 지바 시사회에 다녀왔는데 조총련 여성이 나보고 ‘분희 언니’라고 불렀다. 그는 91년 이후에도 이분희를 가끔 만났다고 했다. 그에게 이분희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말이 없고, 감정 표현도 잘 안 한다’는 답변을 들은 뒤 ‘그쵸?’라며 눈물을 흘렸다. 꿈에서도 이분희를 만났고, 포스터 촬영할 때는 환영까지 보였다. 그래서 펑펑 울었다. 그만큼 만나고 싶었다. 마음속에 이분희를 앉혀놓고 ‘저, 잘하고 있죠?’ 끊임없이 되물었다.”

 - 내내 감정을 억누르다가 우승이 확정된 뒤 감정을 터뜨리는데.

 “연기하며 그렇게 망가질 정도로 울어본 적이 없다. 감정이 몰입된 결승전 촬영이 가장 괴로웠다. 이분희가 맏언니로서 단식을 이겨줘야 했는데 지지 않았나. 그 장면을 찍은 뒤부터 눈물이 나더라. 미안해서 하지원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빨리 복식신을 찍어 패배를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 하지원과 호흡은 어땠나.

 “영화에선 내가 한 살 많지만, 실제로는 한 살 어리다. 하지원과는 첫 작품이었다. 내가 못하는 부분을 언니가 하고, 언니가 부족한 점은 내가 커버해줬다. 현정화-이분희 복식조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

 - 일본영화 ‘공기인형’에선 공기인형을, 올해 개봉하는 미국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선 복제인간을 연기했다.

 “표현을 절제하는 스타일이어서 그런 역이 들어오는 것 같다. 심드렁해 보이는 껍질 속에 마음을 꽉 채우는 연기를 추구한다. 비어있던 내면이 사람의 감정으로 채워져 가는 공기인형처럼 말이다. 양궁(괴물), 배구(굳세어라 금순아), 달리기(플란다스의 개) 등 운동선수 이미지도 있다.”

 - 데뷔한 지 벌써 13년째다.

 “운이 좋았다. 20대 초반 봉준호·박찬욱 감독 등 좋은 감독들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내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빨리 왔다. ‘플란다스의 개’ 찍을 때 봉준호 감독이 ‘영화배우 배두나씨’하고 부르면 ‘네’하며 벌떡 일어나곤 했는데 그때 배우의 정체성이 생긴 것 같다.”(웃음)

 - 사진을 혼자 배워 사진집도 냈다. 다음 목표는 뭔가.

 “런던에서 영국 액센트를 배우고 싶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영국식 영어를 했는데 참 매력 있었다.”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년 4월 일본 지바현 닛폰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남북 탁구선수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첫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90년 시작된 남북 체육회담의 결과물이었다. 현정화(남), 이분희·유순복(북)의 분전으로 최강 중국을 꺾고 우승했다. 시상식에서 한반도기가 오르고 아리랑이 연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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