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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주니치의 20번 유니폼

중앙일보

입력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현 요미우리 감독)의 3번 유니폼이나 '250승 투수' 히가시오 오사무(현 세이부 감독)의 21번 유니폼은 이름만대도 숫자가 떠오를 만큼 친숙한 백넘버라 할 수 있다.

현역 선수 중에서도 마쓰이의 55번이나 이치로의 51번역시 그 선수의 상징과도 같은 백넘버라 할 수있다.(이치로는 시애틀에서도 51번 유니폼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는 달리 주니치 드래곤즈는 특이하게도 특정선수의 백넘버가 아닌 구단 최고의 백넘버가 팀의 최고 투수에게만 주어지면서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다름아닌 선동열이 주니치 시절 사용했던 20번 유니폼이다. 20번 유니폼은 선동열 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번호지만 주니치 구단이 이 20번을 선동열에게 물려준 의미는 결코 간단한게 아니었다. 이 20번 유니폼은 그야말로 주니치 역사상 최고의 투수들에게만 허락되는 백넘버이기 때문이다.

20번 유니폼의 기원은 주니치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스기시타 시게루가 활약했던 5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50년대 주니치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스기시타는 54년 주니치를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재팬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사와무라 상까지 거머쥐었던 그야말로 주니치의 신화적인 투수였다.

스기시타는 50년 27승15패,325탈삼진을 거두며 탈삼진왕을 차지했고,51년엔 28승13패,방어율 2.35의 성적으로 다승왕을 차지한데 이어 54년에는 32승12패,방어율 1.39,탈삼진 273이란 믿어지지 않는 성적으로 다승,승률,방어율,탈삼진을 석권하며 사와무라상까지 차지했다.

이외에도 스기시타는 50년에서 55년까지 6년연속 20승이상을 기록했고, 통산 525경기 출장에 215승123패,1761탈삼진을 거두는 동안 통산 방어율은 2.23에 불과할 정도로 믿어지지않는 구위를 보여주었다. 49년 데뷔해서 61년 은퇴할 때까지 혹사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게 아쉬울 뿐인 '일본판 사이 영'같은 존재였다.

이런 스기시타의 뒤를 이어 주니치의 20번을 빛낸 투수는 주니치의 현 감독인 호시노 센이치다. 아마 시절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게 배신을 당한 후, 앤티 요미우리의 화신으로 변신한 호시노는 감독이 된 지금까지도 요미우리라면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열혈남아다.

69년 주니치에 입단한 호시노는 82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146승121패,방어율 3.60을 기록하며 주니치의 70년대를 이끌었다. 특히 74년 호시노는 15승9패10세이브,방어율 2.87의 성적으로 주니치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요미우리의 V10을 저지시켰다.

또 이해 호시노는 처음 신설된 구원왕과 동시에 사와무라 상까지 거머지는 기염을 토했다. 은퇴 후에도 호시노는 감독으로서 88년과 99년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등, 명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 호시노가 95년 겨울, 한국의 최고투수 선동열을 모셔오면서 20번을 물려준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선동열을 주니치의 에이스로 인정함과 동시에 선동열이 스기시타와 자신의 뒤를 이어서 주니치의 역사에 남는 대투수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희망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20번 유니폼에 대해 나고야 팬들역시 대단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96년 선동열이 부진했을 때 한 나고야 상점의 20번 유니폼은 호시노의 이름으로 걸려있었다. 하지만 97년부터 선동열이 위력을 발휘하자 비로소 그 상점은 선동열의 이름이 적힌 20번 유니폼으로 바꿔달 정도로 20번에 대한 나고야 팬들의 자존심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20번 유니폼을 입은 4년동안 선동열은 나고야의 수호신으로서 10승4패 98세이브를 기록했고,99년 우승까지도 마무리하는 등의 활약으로 20번의 명예를 더욱 드높였다.

하지만 선동열이 은퇴한 후 올 한해동안 20번 유니폼은 임자를 만나질 못했다. 그리고 올해 말 트레이드 시장에서 호시노 감독은 가와사키와 야마다에게 접근하며 20번 유니폼을 옵션으로 내걸었다. 올해 FA를 얻은 가와사키는 98년 사와무라 상을 받았던 야쿠르트의 우완에이스 출신이고, 야마다는 일본 국가대표의 에이스 투수로서 올시즌 신인 중 최대어로 손꼽히는 투수였다.

하지만 야마다는 선발이 보다 확실히 보장되는 다이에를 선택했고, 가와사키는 메이저 행을 원하고 있어서 주니치 입단이 어려워 보인다. 이렇듯 현재까진 올시즌도 20번의 임자를 찾는 게 여의치 않아 보인다.

주니치 역사상 한 획을 그은 대투수들에게만 허용되는 20번 유니폼. 주니치 65년 역사의 자존심과도 같은 상징이다. 모쪼록 20번 유니폼이 스기시타-호시노-선동열로 이어지는 대투수 계보에 부끄럽지 않은 새 임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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