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제대접 못 받는 지방프로

중앙일보

입력

차별이야 인류 역사와 병존했다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방 차별은 거의 질병 수준이다.

'서울의 찬가'는 노래방에서만 부르는 게 아니다. 지방대 졸업장으로는 취업할 곳도 마땅치 않다.

지방대 재학생들이 기를 쓰고 서울의 대학에 편입하려고 난리라는 소식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도 도시의 '잘난' 사람들에겐 여전히 '남의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열을 내면 '그거 모르고 지방으로 갔느냐'는 식의 반응이다.

대한민국에서 지방자치는 요원하고 모든 게 '서울로 서울로' 향하는 시선과 걸음은 막을 수 없는 요원의 불길이다.

광주 문화방송의 곽판주·김민호·윤행석 PD가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5부작 '마한'이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가 주는 '이달의 PD상'을 받았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단서로 숨겨진 고대사의 비밀을 캐는 야심찬 기획이다. 제작기간만도 1년이 넘을 뿐더러 제작비 역시 1억5천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영화로 치면 지방판 블록버스터다.

그러나 어디 돈과 시간에 비기랴. 내가 아는 이 지방 PD 3총사는 그 재주와 정열이 여느 서울 PD에게 뒤지지 않는다.

프로그램 곳곳에 배어 있는 다큐정신, 꼼꼼함, 꽉 여문 상상력이 찬탄을 자아낸다.

한국 영화가 주저앉지 않은 것은 영화인들이 그야말로 삭발까지 하며 이루어낸 투쟁의 결과다. 차제에 나는 방송의 스크린쿼터를 제안하고 싶다. 편성표의 일정한 비율을 반드시 지방방송으로 채우자는 이야기다.

무슨 잠꼬대 같은 이야기냐고 나무라지 말기 바란다. 처음부터 지방방송에서 '쉬리'나 'JSA'를 기대하지만 않으면 된다. 상당기간 시청자들이 '지방방송 하는 시간이다. TV 좀 쉬게 하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한시적 현상을 두고 '그것 봐라. 전파 낭비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속단하지는 말자.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라. 지금 시청률 높은 이른바 서울에서 제작한 방송프로그램들 중 전파를 진정 귀하게 쓰고 있는 게 얼마나 되는가.

어릴 때 들었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는 육지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검게 타버린 젊은 여성의 아픔을 노래했다.

재능있고 자의식 강하고 열의도 넘치는 지방방송 PD들이 서울만 바라보다가 검게 타버리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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