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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4) 류샤오치·덩샤오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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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3년 전인 1963년 7월, 류샤오치(왼쪽 둘째)가 중·소 양당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는 덩샤오핑(넷째)과 펑전(다섯째)을 환송하고 있다. 저우언라이(왼쪽에서 셋째), 주더(첫째·지팡이 짚은 이)와 양상쿤(뒷줄 선글라스 쓴 이)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김명호]

홍위병들의 난동은 순식간에 확산됐다. 베이징의 55개 대학과 100여 개 중학교에서 연일 참극이 벌어졌다. 교장이나 교사들은 축구공 신세로 전락했다. 나이 든 교장들은 살아서 교문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다. 맞아 죽기 싫은 사람들은 수면제를 복용하거나 호수에 몸을 던졌다.

마오쩌둥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공작조(工作組)를 파견해 홍위병 운동을 진압하기로 합의했다. 평소에 하던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두 사람은 마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항저우(杭州)로 갔다. 마오쩌둥은 “어린애들이 해방 며칠 만에 사도의 존엄성을 날려 버렸구나. 몇 명 죽었다고 해서 황급히 공작조를 파견할 필요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류샤오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마오의 의견을 경청했지만 뜻은 굽히지 않았다. 덩샤오핑도 “베이징으로 돌아와 당의 일상 업무를 주재해 달라”고 매달렸다.

마오가 입을 열었다. “병이 완치되지 않았다. 돌아갈 형편이 못 된다. 베이징의 일은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인 두 사람이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 공작조를 꼭 파견해야 한다면 회의를 열어 연구해 보도록 해라.”

인간이란 급할 때일수록 제 편할 대로 해석하기 마련,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파 놓은 함정에 몸을 던졌다. 당 중앙의 명의로 각급 학교에 공작조를 파견했다. 학교를 점령한 공작조들은 류샤오치의 지시대로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격리 수용하고 대자보 게재와 시위, 대형 성토대회를 금지시켰다. “공작조를 신뢰하기 바란다” “공작조가 정한 규정에 반대하는 것은 당 중앙에 반대하는 행위”라는 현수막과 벽보를 학교 곳곳에 내걸었다. 집회를 열어 모든 운동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우파로 둔갑하고 교사 수천 명이 이들에게 동조했다.

마오의 원격조종을 받은 ‘중앙문혁소조’는 당 중앙의 지시를 무시했다. 학생들을 부추겨 공작조의 활동을 억제시켰다. 당도 두 파로 갈라지고 학생들도 공작조를 지지하는 세력과 조반파(造反派)로 양분됐다. 서로 치고받았다. 피가 튀었다.

목숨을 걸고 마오 주석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조반파는 숫자나 전투력에서 공작조를 압도했다. 2주 만에 39개 대학에서 공작조들을 내몰았다. 칭화대에 상주하며 공작조를 지휘하던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도 캠퍼스에서 쫓겨났다. 칭화대 조반파 영수가 “반혁명 수정주의 두목, 중국 최대의 주자파 류샤오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뭔가, 아주 든든한 구석이 없으면 불가능한 구호였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들은 판세를 감지했다. “베이징의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은 류샤오치·덩샤오핑의 당 중앙과 마오쩌둥·린뱌오의 당 중앙 간에 벌어진 대리전이다.”

마오쩌둥은 고향 후난(湖南)성 샹탄(湘潭)현 사오산(韶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은거하며 중앙문혁소조와 총리 저우언라이에게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성 서기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 소일하며 부인 장칭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 몸 안에 있는 호랑이와 원숭이의 기가 꿈틀거린다. 호랑이는 원숭이의 보좌를 받아야 질주할 수 있다. 천하대란(天下大亂)을 거쳐야 대치(大治)에 도달할 수 있다. 7, 8년에 한 번씩 꼭 거쳐야 한다. 물질은 변하는 법이 없다. 분쇄시켜야 한다. 이건 하나의 연습이다. 좌파와 우파,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동요하는 중간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교훈이 돼야 한다”며 혁명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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