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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정은, '여성은 꽃이라네' 공연 보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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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자엔 김정은이 1월 25, 26일 이틀에 걸쳐 서명한 9개의 사진이 실렸다. 그중 하나는 ‘청년들의 힘찬 발걸음에 의해 강성한 내일은 더욱 앞당겨지게 될 것이다. 언제나 곧바로 당을 따라 앞으로’라고 돼 있다. 2월 14일자 서명 7개 가운데는 ‘민흥단, 이축복, 이경연, 유소금, 고후회가 보낸 경애하는 김정은 선생님께 삼가 올립니다’ 서한에 ‘훌륭히 자라 미래의 주인공들이 되거라’라고 써 자상함을 과시했다. 2월 16일자엔 만포 시민들이 흰쌀 100t을 김정일 동상 작업에 동원된 군인에게 보내겠다고 한 데 대해 ‘성의만 받겠다’고 한 뒤 “흰쌀을 시 안의 인민들, 어린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답했다.

2월 25일에는 모판 씨 뿌리기를 하다 흙더미에 덮여 2월 1일 사망한 연안군 오현 협동농장 분조장 이창선에게 ‘집단과 동지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는 것은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키우신…미덕이다…’라는 긴 내용을 썼다. 친필 내용은 자상하거나, 단호하거나, 칭찬하는 등 다양하다. 친필을 보낸 사람의 수로 김정일 사망 전후 100일을 비교하면 30대2의 압도적 차이를 보인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전후 100일엔 그런 게 일절 없다. 탈북자 이금룡씨는 “김일성·김정일 시절에도 친필은 활용됐지만 이처럼 무더기로 내보내진 않았다”며 “기반이 없는 김정은이 서두르기도 하고 ‘인민에게 따스함을 보여준다’는 김정일식 광폭정치도 반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음악회 관람도 주요 수단이다. 김정은은 애도 연장 기간으로 간주되는 100일 동안 꾸준히 음악회를 갔다. 94년 김정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김정은은 1월 3일엔 은하수 신년음악회 ‘태양의 위업 영원하리라’에서 ‘김정일 동지께 드리는 노래’ ‘그이의 한 생’ ‘장군님이 그리워’ 같은 것들을 들었다. 1월 15일에는 4·25문화회관의 ‘영원토록 받들리 우리 최고사령관’ 공연, 1월 29일엔 조선 인민군 군악단 연주회, 2월 18일엔 은하수 광명성절 음악회, 3월 9일엔 ‘여성은 꽃이라네’ 공연을 관람했다. 모두 5회였다. 김정은의 동정은 노동신문 1면 대형 톱 기사였다. 김정일은 사망 전 100일 동안 세 번의 음악회를 간 정도다. 김진하씨는 “노래 정치를 더 힘 있게 독려하는 것”이라며 “각종 단체들은 김정은이 관람한 내용의 공연을 반복하는 준비를 하게 된다”고 했다.

김정일 관련 대형 시를 싣는 것도 눈길을 끈다. 노동신문은 1월 1일자에 ‘조선의 새해’라는 장시를 소개했다. 1월 14일엔 ‘사랑을 바치자 장군님 조국에’라는 제목 아래 5개의 시를, 2월 13일엔 ‘영원한 선군의 태양 김정일 동지’(조선작가동맹 시문학분과위원회 명의)를, 3월 25일엔 ‘백일 낮, 백일 밤’이라는 대형 시를 실었다. 김정일 사망 전에도 김정일 예찬 시가 4회 등장하지만 뒷면 작게 배치됐다. 요컨대 2011년 12월 30일 이후 100일 못 미치는 사이 20회에 걸쳐 5일에 한 번꼴로 북한 주민의 눈과 귀를 압박하는 감성 선동 이벤트를 편 것이다. 김일성 시대, 김정일 시대에 없던 현상이다.

그사이 공백은 기념사업으로 포장한 다양한 김정일 우상화가 채운다. 김정은은 ▶2011년 12월 31일 김정일 기념우표를 발행한 데 이어 ▶1월 5일 대사면을 했고 ▶김정일 생일(2월 16일)을 광명성절로 만들고 ▶김정일 동상(태양상)을 만들고, 영생탑 건설 결정을 내린다 ▶대원수 호칭을 부여하고 ▶2월 5일엔 김정일 훈장, 김정일 청년 영예상, 김정일 소년 영예상을 제정하고 2월 14일 각 메달의 휘장에 대한 그림 풀이와 더불어 136명에게 김정일 훈장을 수여를 발표한다 ▶2월 9일자에는 금·은 두 종류 기념주화를 발행키로 한다. 김일성 사망 뒤 김정일 100일엔 없었고 이후 서서히 해왔던 것들이다. 한 관측통은 “앞으론 김정일을 부각시키면서 김정은이 그를 계승한 인물이라고 집중하게 만드는 상징조작”이라고 지적한다.

선동성이 강한 노동신문 정론이 김정은 집권 이후 이전 동기보다 두 배 늘은 것(8회)도 감성정치와 관련 있다. 사망 전엔 ‘따듯한 보금자리’ ‘함남의 불길’ ‘10월의 축하연’같이 여러 주제를 다루는데, 사망 후에는 ‘발이 닳도록 인민군 속으로’ ‘부글부글 끓자’ ‘팔을 끼고 어깨를 겯고’ ‘불바람 휘몰아쳐와도’같이 김정은을 모신다는 내용이 주류다. 김일성 사망 뒤엔 정론은 줄었었다. 김정일을 선전할 특별한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다.

국립외교원 윤덕민 안보통일연구부장은 “94년 김정일은 100일간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3년상 때도 드러내거나 연설한 적이 없는데, 김정은은 웃고 다니고 음악회도 다닌다”며 “젊은 감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신은 내놓고 다니지 않으면 모르는 존재가 되니 그러는 것이며 지도자가 되기 위한 상징조작·우상조작 단계”라고 말했다. 한편에선 북한 리더십이 김일성·김정은의 폐쇄적 형태에서 개방화되고 있는 것이란 분석도 내놓는다.

감성에 비중을 두는 것과 비교해 김정은 체제의 사상 강조는 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노동당의 사상, 정책 노선, 당면 과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설이 노동신문엔 100일 중 14건이 나왔는데 사망 전과 비슷하며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다. 이는 김일성 사망 뒤 김정일 정권 초기에 ‘김일성의 유훈 실현’을 사설 19회, ‘지상연단’ 9회, ‘위대한 향도 시리즈’ 17회 같은 것으로 강조한 것과 비교된다. 노동신문 비교는 준비된 지도자 김정일과 준비가 덜 된 지도자 김정은의 차이와 이를 극복하려 김정은이 속도를 내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안성규·홍상지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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