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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공포의 화가 뭉크의 미공개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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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그림에 대한 책이 늘었습니다. '천천히 그림 읽기'(진중권 조이한 지음, 웅진닷컴 펴냄)과 같은 그림 감상법에 대한 책이나, 우리 Books 사이트에서 '조용훈의 그림읽기'를 연재하고 있는 청주대 국문과 교수 조용훈 님의 '그림의 숲에서 동서양을 읽다'(조용훈 지음, 효형출판사 펴냄)와 같은 독특한 시각의 그림 감상법 책도 있지요.

이어서 창해 출판사에서는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시리즈로, 폴 고갱, 마네, 드가 등 주요 서양화가들의 개인 화집 형식의 전기물들을 잇따라 내고 있습니다. 이같은 책들은 이른바 베스트셀러 대열에 순간적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꾸준히 그림을 보는 독자들에게 읽힐 겁니다. 출판사에도 좋은 일일테고, 독자 입장에서도 두고 두고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하겠지요.

이같은 분위기에서 얼마 전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다빈치 펴냄)이라는 우리의 대표적 서양 화가 이중섭의 편지 모음집을 냈던 출판사에서 이번에는 서양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미공개 일기 등을 엮어 옮긴 '뭉크뭉크'(에드바르트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다빈치 펴냄)를 냈습니다.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잘 모른다 해도 그의 대표작 '절규'를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무엇엔가에 질린 표정으로 귀를 막은 채 절규하는 괴이쩍은 그림 말입니다. 공포의 체험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뭉크의 대표작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뭉크는 가난한 환경, 어머니의 죽음, 우울한 성격의 아버지, 누이 소피에의 죽음 등 가난과 우울과 죽음의 불안 속에서 자랐습니다. 열아홉 살 때 그는 처음으로 두상 소묘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 재능있는 화가로 주목받게 됩니다. 이후 급진적인 표현형식인 인상주의를 반영하는 소묘들을 주로 그렸지요. 처음부터 그는 '화가로서 자기만의 자유를 지니고' 있었던 대단히 독특한 개성의 작가로 주목받습니다.

스물 여섯 살이 되던 1889년부터 그는 노르웨이 정부 장학금을 받으며 파리에 유학하게 되는데, 이때의 심경을 적은 미공개 일기가 바로 이 책에 수록된 일기입니다. 당시 순간의 인상을 재현하자는 인상주의 작가들의 요구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본 것을 그린다"고 말하면서, 순간의 인상이 아니라, 기억 속에 남은 인상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에 감정이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겁니다. 순간적인 묘사가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남은 인상을 주관적 기억에 의존해 그려내는 방식인 거죠.

일련의 판화 작업을 거쳐 '생의 프리즈' 등의 유화를 통해 독특한 그림의 세계를 구축하던 그는 내면적으로 늘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1908년 정신분열증을 겪게 됩니다. 여덟 달 동안의 치료를 통해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던 그는 이후 1916년까지 '노르웨이 회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오슬로 대학의 대강당 벽화를 그려내는 등 만년의 역작을 생산해냅니다.

화가 뭉크의 색다른 시도 중의 하나는 이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 형식의 글들과 석판화를 삽화로 집어넣은 드라마 형식의 글들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다룬 창작 우화 '알파와 오메가' 또한 화가로서는 별다른 시도이지요.

뭉크는 194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1천2백 점의 유화, 7천5백 장의 드로잉, 1만8천 점의 판화와 6 점의 조각을 남기는데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오슬로 시에 기증합니다. 지금 그의 모든 작품은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보관돼 있답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살아 있는 생생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숨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그런 모습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살덩어리는 형상을 담아낼 것이고 색깔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이 책 49쪽에서)

창작에 임하는 화가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날이 밝아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슬픔에 젖어 있는 것 말고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백만 가지의 기억에 묻혀 외로이 앉아 있었다. 그것들은 백만 개의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다."(이 책 59쪽에서)

일생을 죽음의 불안 속에서 살다 정신분열증까지 겪어야 했던 섬약한 한 예술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일기이지요.

뭉크는 자신의 일기를 마치 그림 그리듯 일상 생활을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의 문장으로 썼습니다.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주장처럼 일기 역시 기억에 의존해 쓰는 것인데, 그는 일기 한 줄을 쓰기 위해 자신의 기억 세포를 최대한 가동하는 방식입니다. 일상적으로 나눈 대화 한 마디까지 꼼꼼히 기억해, 그대로 적어내는 식이지요.

일기 끝에는 아주 짧은 단편 소설 형식의 글 두 편이 추가돼 있고, 드라마 형식의 '수난의 역사' '자유도시의 사랑'이 이어집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창작 우화에는 자신의 석판화를 삽화로 끼어넣어 마치 고급 그림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조용훈의 그림읽기'를 연재하는 조용훈 님은 "그림 그 자체도 좋아하지만 그림을 그려내기까지 화가가 겪는 순간 순간의 예술적 고민, 창작의 고통 그런 것도 사랑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서라면 대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미공개 일기는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셈입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 이 글에서 함께 이야기한 책들
'천천히 그림 읽기'(진중권 조이한 지음, 웅진닷컴 펴냄)
'그림의 숲에서 동서양을 읽다'(조용훈 지음, 효형출판사 펴냄)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시리즈(창해 출판사 펴냄)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다빈치 펴냄)
'뭉크뭉크'(에드바르트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다빈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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