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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파 신예와 정명훈의 완벽 호흡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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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호 17면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고 청년 시절이 떠오른 사람이라면, 푸치니의 ‘라 보엠’을 보고 나서는 가진 것 없지만 자유롭고 행복했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레퍼토리 중 하나이며 누구나 아리아 한 소절쯤은 다 들어본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이 국립오페라단 창단 50주년 기념작으로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무대에 올랐다.

국립오페라단 창단 50주년 기념 ‘라 보엠’ 4월 3~6일 예술의전당

4월 4일 둘째 날 공연은 푸릇푸릇한 젊음의 향연이었다. 무엇보다도 마르코 간디니의 연출은 무척 반가웠다. 30년 이상 전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을 지배하고 있는, 라 보엠 하면 공식처럼 떠오르는 ‘프랑코 제피렐리’류의 연출과 무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둘째 날 캐스팅은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주역들의 몫이었다. 로돌포에 강요셉, 미미에 홍주영, 무제타에 전지영, 마르첼로에 공병우, 쇼나르에 김주택, 콜리네에 이형욱이 출연해 패기 넘치고 신선한 연기와 가창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 신선한 ‘무기’들을 가수진으로 장착한 정명훈의 음악 장악력은 매우 빼어났다. 특히 이탈리아어로 푸치니가 표현한 19세기 파리 정서를 정명훈은 오랜 파리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만의 음악적 자연스러움으로 재현해 냈다. 특히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잡아낸 정명훈과 서울시향, 파리 센 강 좌안 라탱 지구 다락방에서 바로 나온 듯한 청년들의 척척 맞는 호흡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은 청중을 극에 완전 몰입하게끔 만들었다.

‘라 보엠’은 아무리 메트(The Met)같이 시스템이 잘 갖춰진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하더라도 로돌포와 미미 중 한 명만 좋지 않으면 그날 공연은 맥이 빠져버리는, 즉 주역의 감성 화학반응이 반드시 필요한 오페라다. 첫째 날 김동원을 대신해 공연했던 테너 강요셉은 이날은 다시 로돌포로 나서, 이틀 연속 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고음을 자신 있게 들려주어 격찬을 받았다.

미미를 부른 홍주영은 ‘레가토의 여왕’이라고 할 만큼 리리코 푸로 소프라노로서 여유롭고 풍성한 성량과 울림으로 역을 소화해 냈다. 단어 하나, 프레이징마다 색깔을 다채롭게 넣어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2막은 제피렐리 연출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하면서도 정감 있는 파리 크리스마스 마켓의 분위기를 그 어떤 라 보엠보다 훌륭하게 그려냈다. 이별의 3막 마지막 장면에서는 무대를 밑으로 꺼져가게 하면서 두 주인공도 뒷모습으로 퇴장하게 하는 아름다운 연출로 센티멘털한 감정을 극대화시켰다.
특히 마지막 4막에서 미미가 세상을 떠난 것을 깨닫고 오열하는 로돌포의 모습은 역대 로돌포 중 가장 슬프게 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강요셉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청중을 울렸다.

‘라 보엠’ 음악을 전편에 깔았던 영화 ‘문스트럭’에서 노만 주이슨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간디니도 달을 이 오페라의 상징적인 모티브(배경)로 삼았다. 1막에서 로돌포와 미미가 만날 때는 초승달이었던 달이 4막 죽음으로 헤어질 때가 되자 보름달이 되어갔다. 이들의 사랑은 죽음 때문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채워져 가는 달 때문에 더 슬펐다.
이날 공연은 예술적으로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이 축복받은 오페라 프로덕션에서 단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4막 도입부에서 일시 기계 고장으로 막이 올라가지 않았던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정명훈이 노래하는 가수들을 지휘하기 위해 상체를 굽혀야 했을 정도로 무대 커튼이 올라가지 않아 옥에 티가 됐다.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라 보엠’은 한국 오페라의 수준을 다시 한 단계 높인 걸작이었다. 5월에 펼쳐질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의 공연도 무척 기대된다. 한국이 세계 일류 오페라 극장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을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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