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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우개 쓰려면 시작부터 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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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 지난해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故) 송지선 아나운서. 최근 그녀의 미니홈피를 점검한 결과 고인을 모독하는 게시물과 욕설이 즐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송씨의 가족은 인터넷에서 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했다. 딸의 죽음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녀의 홈페이지가 갖은 비난으로 더럽혀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웠다. 송씨의 아버지는 “사고 뒤 6개월쯤 지나면 홈페이지가 없어지는 걸로 알았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다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JTBC가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하자 미니홈피를 관리하는 업체 측은 악성 댓글을 삭제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업체 관계자는 “별도로 모니터팀을 꾸려 악성 글을 지우는 등 특별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홈피 삭제만큼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유가족이 가족 확인 증명서를 제출해 가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뒤 일정 절차를 밟아야 고인의 홈페이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블로그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자신의 정보를 삭제할 권리를 뜻한다. 예를 들어 헤어진 이성 친구와 함께 지낸 흔적, 성형수술 전 사진 등 지우고 싶은 과거 모습이 주요 삭제 대상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정보도 포함된다. ‘잊혀질 권리’는 정보화에 앞서 있으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이 투철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보장 방안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정보화에 관한 한 세계 선두그룹인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요구가 쏟아지지만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법조계를 중심으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이유다.

법 따로, 현실 따로

‘잊혀질 권리’는 법으로는 어느 정도 보장돼 있다. 문제는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 있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통신 사업자에게 ‘개인정보를 정정하거나 삭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에도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인터넷 지우개’를 쓰려고 하면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친다. 관련 게시물을 찾아서 해당 사이트에 삭제 요청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정보가 어디에, 얼마나 퍼져 있는지 모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순식간에 번진 기록들을 일일이 모아야 할 뿐만 아니라 왜 지워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국회의원은 부정적인 게시물을 모으고 삭제를 요청하는 전담 아르바이트생을 둘 정도다. 인터넷기업협회 관계자는 “정보가 복제돼 관리 권한이 없는 사이트로 넘어가면 사실상 개인정보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기술적 한계

인터넷 업계는 나날이 높아지는 ‘잊혀질 권리’ 보장 요구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우선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거다. 한 포털사이트 관계자는 “정보 교류에 울타리가 없는 인터넷 특성상 개인의 정보가 복제돼 순식간에 수십 개의 사이트로 퍼져 나가면 지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구글이나 트위터처럼 외국에 기반을 둔 사이트는 국내법으로 규제하기가 더욱 힘들다. 임종인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장은 “외국 업체는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국내 업체와 비교해 역차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특히 미국의 경우 프라이버시보다 알 권리를 우선하고 있기 때문에 삭제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잊혀질 권리 vs 표현의 자유

최근 젊은 여성이 택시기사에게 반말과 욕설을 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이른바 ‘택시 막말녀’ 사건. 네티즌들의 신상털기가 시작됐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34세 여성이라는 정보와 확인되지 않은 휴대전화 번호까지 나돌았다. 온라인 신상털기에 당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더욱이 엉뚱한 사람이 신상털기의 피해를 당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잊혀질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주무 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제도화를 추진 중이다. 한국정보법학회 강민구 회장(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은 “과거의 잘못된 기사를 삭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개인이 자신의 정보를 관리하거나 정리할 수 있는, ‘소비자 데이터 주권’을 보장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구태언 변호사는 “개인의 정보보호를 무제한으로 보장하게 되면 표현의 자유나 역사 활동, 경제 활동과 충돌할 수 있으므로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넷에 한 번 올려진 정보는 완벽하게 지우기가 어렵다는 기술적 한계도 자주 거론된다. 그럼에도 국내 현실에 맞는 법률 검토를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윤종수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잊혀질 권리가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고 어느 범위까지 허용되는지 등에 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JTBC 윤유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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