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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욕심 없는 척 말년 보낸 압구정, 지금은 간 데 없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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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현대아파트 74동 뒤에 세워져 있는 압구정터 표지석. [김경록 기자]

압구정(狎鷗亭)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왕위에 등극시킨 한명회(韓明澮, 1415~87)가 지은 정자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압구’는 ‘세상사 모두 잊고 갈매기와 벗하며 지낸다’는 뜻이다. 한명회는 지금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자리에 정자를 짓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곳에서 지냈다.

최병식
강남문화원 부원장
(문학박사·고고학자)

 1970년대 초만 해도 압구정동은 온통 배밭이었다. 배꽃이 만발한 이맘때쯤의 압구정 정취는 아름다웠다. 하얗게 피어난 배꽃 사이로 바라보는 한강은 압구정의 절경이었다. 신사동에서 압구정까지는 흙길이어서 비가 오면 진흙탕길이 되던 시절이었지만 한강과 압구정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로맨틱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배나무들은 사라지고 대신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압구정을 세운 세조의 오른팔 한명회는 희대의 모사(謀士)였다. 어머니 이씨는 임신 일곱 달 만에 칠삭둥이로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 위에 검은 점이 ‘천하의 주인’을 상징하는 태성(台星)과 두성(斗星)을 닮았다고 한다. 어릴 때 개성 영통사(靈通寺)의 노승은 그를 가리켜 “두상에 광염(光焰)이 있으니 귀하게 될 징조”라고 말해 일찍부터 크게 될 인물임을 암시했다.

 기대와는 달리 한명회는 글은 좀 읽었지만 과거시험은 볼 때마다 떨어졌다. 37세에서야, 그것도 겨우 추천에 의해 경덕궁 궁지기 일을 얻는다. ‘귀하게 될’ 운명을 타고난 덕분인지 그는 수양대군과 만나게 되고 뛰어난 책모(策謀)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린다. 이때부터 정난 일등공신에 올라 조정의 주요 관직을 섭렵한다.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도승지·병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영의정까지. 세조는 한명회를 가리켜 ‘나의 장자방’이란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총애했다. 장자방(張子房)은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책사 장량(張良)의 자(子)로 최고 전략가 또는 참모를 일컫는다. 오죽하면 죽음을 앞두고 세자인 예종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남길 정도였을까. 한명회는 원상(院相, 어린 왕을 보필하는 재상급 벼슬)으로 예종을 돌보다가 나중엔 예종의 장인까지 된다.

 한명회의 책모는 빈틈없었고 시국을 읽어내는 감각 또한 거의 동물적일 정도로 뛰어났다. 계유정난을 앞두고 수양대군 일파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반대세력의 감시가 심해졌다. 이탈자까지 나오면서 수양대군이 거사를 주저하자 한명회는 “길 옆에 집을 지으려면 3년이 돼도 짓지 못합니다. 지금 비록 의견이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라며 수양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수양대군은 정난을 실행해 김종서를 암살하고 황보인(皇甫仁) 등 조정 대신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주살한다. 한명회의 살생부에 따라 30여 명의 고관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다.

 칠삭둥이 한명회는 세조에겐 장자방 이상의 의미를 가진 신하였다. 한명회는 결정적으로 두 차례나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 중국 사신을 초청한 궁중 연회에 의례적으로 세우던 운검(雲劍, 무장을 상징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서지 못하게 해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더니 성곽이 없는 창덕궁의 수비를 강화해 ‘남이장군의 거사’를 막아 세조를 살린 것이다.

 계유정난 때 한명회가 앞장서 주살한 재상 황보인과의 특별한 인연이 그의 묘지석(墓誌石, 망자의 신분이나 일대기를 돌에 기록해 묘에 묻는 유물)에서 나와 흥미를 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에 있는 한명회 무덤에서 2000년 도굴된 지석 24매를 2009년에 되찾으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 내용이다.

 ‘재상 황보인이 한명회를 한 번 보고는 ‘국사(國士)’라고 생각해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려 했으나 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지석에 따르면 그의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韓尙德)이 “그(황보인)는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만약 혼례를 받아들인다면 부귀하게 될 것”이라며 거절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한명회는 “지어미의 권세에 힘입어 영화로운 길을 바라보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겸손한 말과는 달리 황보인의 사위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한명회의 야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겸재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에 실려 있는 그림 ‘압구정(狎鷗亭)’. [중앙포토]

 한명회의 야망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한 사람의 아랫사람이요, 만인의 윗사람이다)’이라는 영의정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첫째 딸은 예종에게, 둘째 딸은 성종에게 시집 보냈으나 세자를 낳지 못해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는 장순왕후(章順王后, 제8대 예종의 왕비)와 친자매 사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2대에 걸쳐 두 임금의 장인으로 군림했던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가 닥치는 법이다. 성종은 나이 일흔이 된 그에게 궤장(<51E0>杖, 임금이 국가에 공이 많은 늙은 신하에게 명예로운 퇴임을 기념하며 선물하는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권력에서 물러나기를 바랐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의 끝없는 권력 욕심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자 압구정을 짓고는 들어앉아 권세에 욕심이 없는 척 했다. ‘청춘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낙향거사 행세를 한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는 법. 어느 날 부패한 세상을 조롱하던 생육신 김시습이 이 시구를 보고는 부(扶)를 危(위)로, 와(臥)를 오(汚)로 바꿔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더니,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로 조롱했다. 권력과 부귀영화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버리고 노년을 갈매기와 노닐며 한가롭게 보내겠다던 압구정은 사실은 그의 욕심을 가린 교활한 가면이었을 뿐이다.

 절대권력을 마음껏 누린 한명회는 죽어서 충성(忠成)이란 시호와 함께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됐지만 역사의 평가는 가혹했다. 그가 물러날 때를 알고 근신했더라면 최소한 조롱 받고 끝내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에서 시신을 끌어내 참수하는 형벌) 당하는 치욕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명석한 두뇌와 동물적인 정치감각으로 세 왕조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멈출 줄 모르는 욕심 탓에 불행을 자초한 셈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현대아파트 74동 뒤쪽에 압구정의 위치를 가리키는 ‘압구정지(狎鷗亭址)’가 새겨진 표지석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일찍이 ‘압구정’이라는 명당을 알아본 한명회의 혜안(慧眼)은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책사답지 않은가.

글=최병식 강남문화원 부원장 (문학박사·고고학자)
사진=김경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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