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눈 없고 귀 없는 나무처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김기택
시인

손가락이 나무를 만진다. 두 팔이 나무를 껴안는다. 코와 입이 나무의 냄새를 마신다. 나무를 만지며 내려가던 손이 옹이에서 멈춘다. 옹이를 만지는 손이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무랑 얘기하는 중이야. 나무와 데이트하는 중이야.”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 영화 ‘달팽이의 별’의 한 장면이다. 시청각 중복 장애인인 조영찬씨의 눈과 귀는 손가락에 달려 있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 끝에 있는 우주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나무를 자주 껴안는 이유는 나무가 “자신과 같은 시청각 장애인”이기 때문이란다.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온몸으로 바람과 햇빛과 땅과 하늘을 느끼는 나무가 친근한 모양이다. 나무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 모양이다. 겨울 백사장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을 손가락으로 처음 만져보고는 “바람 부는 냉장고” “춤추는 냉장고”라고 자기가 느낀 대로 이름을 붙여준다. “촉각은 제한적이지만 가식이 통하지 않는다. 손으로는 가짜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손을 잡으면 마음이 느껴진다. 촉각으로는 섣불리 전체를 판단할 수 없기에 항상 겸손해진다”고 그는 중앙일보 대담에서 말한 바 있다.

 그는 척추장애인인 아내 김순호씨와 손가락 등에 점자를 찍는 점화(點話)로 대화한다. 그는 아내의 눈과 귀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나무, 꽃, 빗방울 등 자연을 만질 때 마음이 환하게 열린다.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건 아내의 손가락이다. 아내의 손끝에선 꽃향기와 별빛이 느껴진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촉각을 통해 열리는 작은 생명체와 사물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경이이고 신비다. 그가 나무를 만지면 그의 몸은 나무가 되고 꽃을 만지면 꽃이 될 것 같다. 촉각으로 세상을 만나는 그의 태도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현대인이 많이 사용하는 뇌와 눈은 자연에 대해 오만하지만 동물을 많이 닮은 촉각은 겸손하다. 그러나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촉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달팽이의 별’은 눈과 귀를 잃은 한 장애인을 통해 현대인이 무엇을 잃고 사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를 보면 오지에서 옛날 방식대로 사는 어떤 종족은 도끼로 나무를 베려 하면 나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주기만 하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나무를 베는 것은 어머니를 죽이는 것과 같은 죄로 여겼다고 한다. 나무에 꽃이 피면 임신한 여자와 똑같이 여겨서 큰 소리를 내거나 등불을 들고 근처를 지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나무를 이웃이나 친구나 형제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현대인에게 나무는 단지 목재이고 돈이고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일 뿐이다. 현대인은 돈과 자원을 얻은 대신 눈 없고 귀 없는 친구와 마음으로 소통하는 행복을 잃은 셈이다.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아파트 단지 정원에 있는 키 크고 잘생긴 소나무들이 반은 죽어 있는 게 보인다.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것이다. 공사할 때 폐자재가 섞인 흙으로 정원을 메우고 방치한 까닭이다. 아파트 그늘에는 광합성을 하지 못해 누렇게 죽어가는 삶을 필사적으로 견디는 나무도 있다. 심은 게 아니라 정원이라는 영역 표시를 하기 위해 말뚝을 박아놓은 것 같다. 도시의 나무들은 도로 옆에서 종일 매연을 마시고 있거나 시멘트 사이의 자투리 땅에서 겨우 존재하고 있다. 도둑고양이처럼 쓰레기만 뒤지고 다니지 않을 뿐이지 노숙자와 다를 게 없다. 게다가 현수막 끈으로 묶고 광고 붙여 놓고 이름을 새기거나 가지치기를 당해 잎 달린 말뚝이 되어 있다. 간판을 가려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화가 난 가게 주인에게 잘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천덕꾸러기와 왕따가 없다. 용케 가구나 목재가 되는 걸 피한 나무들은 이런 구차한 삶을 감당해야 한다. 아니면 분재가 되어 애완동물처럼 실내에서 살아야 한다.

 오늘은 식목일이다. 나무를 심지는 못하더라도 왕따 같고 장애인 같은 나무를 연민의 눈으로 보아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돈과 경쟁과 욕망에 혹사당하는 눈과 귀를 잠시라도 닫아 보자. 눈 없고 귀 없는 나무처럼 햇빛과 바람과 흙냄새와 하늘에게 온몸을 열어보자.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