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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잦은 학생에게 ‘담임 선생님께 모닝콜 일주일’을 선고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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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제1차 도당자치법정을 개정하겠습니다. 재판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질서담당관의 식순 안내에 따라 세 명의 학생 판사가 입장했다. 지난달 21일 경기도 도당고 학생회실에서 ‘도당자치법정’이 열렸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이 법정은 규칙을 어겨 벌점을 많이 받은 학생을 선도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학생들이 판사와 변호사·검사·배심원을 맡아 법정에 선 친구를 심문·대변한다. 이날 도당고를 찾아 법정에 참여했다.

김슬기 기자

도당자치법정에서 판사 김도연군이 의사봉을 내리치며 피고인에게 평결을 선고하고 있다. [김진원 기자]

“본 학생자치법정은 학생들을 처벌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학교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이 핵심임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판사를 맡은 김도연(18)군이 법정 시작을 알렸다. “피고인은 지각이 벌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검사 김도영(18)군이 피고인 학생에게 심리를 시작했다. 피고인은 “학교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지각 사유를 설명했다.

검사의 심리가 끝나자 변호사의 반대심리가 이어졌다. 변호사 김영광(18)군이 물었다. “피고인은 벌점에 관해 구체적인 안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피고인이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김영광군은 “사전에 피고인에 대한 벌점 지도가 부족했으며, 피고인 스스로 벌점을 줄이고자 노력한 사례가 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심리공방이 끝나자 재판부는 7명의 배심원들이 만든 평결을 토대로 피고인에게 아침선도 7일, 교사 업무보조 5일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이번 일을 계기로 지각을 줄이고 학교생활을 더 열심히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기발한 판결, 처벌 보다 선도가 목적

도당자치법정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하에서 학생들의 선도 방법을 고민하던 도당고 교사들의 아이디어다. 도당고 김종태 교감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규칙을 준수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상점과 벌점을 주는 마일리지 제도를 발전시켜 도당법정을 고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도당자치법정은 그린 마일리지제도와 함께 운영되고 있다. 그린 마일리지제도란 선행이나 수상 등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됐을 때 부여되는 ‘칭찬점수(그린 마일리지)’를 말한다.

반대로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거나 학교 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를 하면 ‘지도점수(레드 마일리지)’를 받는다. 지도점수가 20점 이상 쌓인 학생에겐 벌점을 감면할 수 있는 생활지도 프로그램이 적용된다. 이때도 벌점을 감면받지 못한 학생들은 최종적으로 도당자치법정에 회부된다. 담임교사의 추천과 면접을 통해 선발된 판사·검사·변호사 학생들이 법정을 진행한다. 법정을 담당하는 신동진 교사는 “학생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므로 교사가 학생을 일방적으로 처벌하던 방식보다 선도 효과가 높고 학생 인권도 존중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 받았던 학생이 배심원 역할 맡아

마일리지제도와 법정이 생긴 이후 도당고는 학생 지도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전학·퇴학 학생 수는 2010년 41명에서 2011년 18명으로 줄어들었다. 선도위원회에 회부되는 학생 수도 같은 해 54명에서 10명으로 감소했다. 이는 법정에서 주어지는 처분이 일방적인 처벌보다 선도 기능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긍정적인 벌’로 불리는 법정처분은 학생 스스로 행동을 반성해 볼 수 있는 벌로 구성돼 있다. 신 교사는 “지각을 자주 한 학생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알려줄 목적으로 모닝콜하기 벌점을 일주일간 부여하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매일 정확하게 모닝콜을 건다”며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끔 하는 벌들이라 학생들의 거부감도 적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감은 “마일리지제도와 도당법정은 학생이 자신의 태도를 객관화해 평가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간접적인 사법 제도 참여 경험을 통해 선행은 늘리고 비행은 예방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린 마일리지를 착실히 쌓고 다른 학생의 모범을 보인 학생에게는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올 1월엔 ‘우수모범학생’으로 뽑힌 12명의 학생이 3박4일간 중국 견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법정에 서는 학생과 재판을 이끄는 학생 모두 ‘준법 정신 함양’을 장점으로 꼽는다. 지난해 법정에 회부된 적이 있는 이종민(가명)군은 "법정에 선 경험이 나의 교내 생활을 바꿔 놓았다”며 도당 자치법정에 섰던 날을 회상했다. 법정에 서기 전까지 이군은 학교 친구들 앞에 회부되는 상황이 불편했다. 그러나 법정을 진행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친구들이 나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 한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내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필기하고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하는 등 성실한 학생이 됐다”고 자랑했다.

법정은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까지 자연스럽게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방청객으로 참여한 이인재(17)군은 “‘법정까지는 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게 된다”며 “법정이 질서 위반 행위를 예방하게끔 만든다”고 말했다. 특히 배심원은 과거에 재판에 회부된 경험이 있는 학생들의 지원을 받아 뽑고 있다. 죄를 변명하던 입장에서 평결을 내리는 역할까지 하게 해봄으로써 반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자는 취지다. 신 교사는 “인격적인 방법으로 학생들을 교화한다는 점에서 도당자치법정은 교사와 학생이 벽을 허물고 소통하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1년간 판사 해 본 김도연(18)군

도당자치법정을 통해 어렸을 적 꿈인 판사를 이뤄보고 싶어 지원했습니다. 친구들을 재판할 때는 처벌이 합리적인지 늘 생각했어요. 한 번은 다른 판사들 없이 혼자 법정에서 20여 명의 친구에게 판결을 내려야 했습니다. 유독 법정에서 태도가 안 좋은 학생이 있었는데, 형벌을 과하게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컸습니다. 하지만 법정의 취지가 처벌이 아닌 ‘선도’에 있는 점을 되새겨 가중 처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1년간 법정을 통해 친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어 뜻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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