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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자구안 발표 의미와 전망]

중앙일보

입력

현대가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이번 자구안으로도 자력갱생이 어렵다면 모(母)기업인 현대건설의 생사여부를 정부와 채권단에 맡긴다는 각오를 토대로 최종 자구안을 제시한 것이다. 규모는 1조원이라는 `잠정 가이드라인'을 훌쩍 넘어 1조2천여억원에 달했고 내용도 그간 4차례에 걸친 자구안과는 달리 나름대로 실효성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전반적인 전망은 "가능성은 있지만 낙관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성장동력 부재와 경기침체라는 대내외적 악재가 낙관론을 꾸준히 위협하고 있다. 결국 `자구의 강도와 속도'만이 유일한 생존해법이라는 것이 재계의 지적이다.

◇ 자구계획 실효성은 갖춰 = 이번 자구안을 두고 현대는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규모가 총 1조2천억원으로 일반의 예상치를 크게 웃돌고 이행내역까지 명시, 실천 가능성이 어느 때 보다 높다는 얘기다. 특히 정몽헌(MH)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정주영 전명예회장이 각각 400억원과 900억원의 사재를 출자한 점은 오너의 강력한 의지 표명으로 시장신뢰 회복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으로 현대쪽은 보고 있다. 정 전명예회장의 회사채 1천700억원을 출자전환한 것 역시 사재출자와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나머지 자구안중 서산농장과 계동사옥을 빼고는 당장 `현금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인천철구공장 매각(400억원)은 자동차 소그룹내 인천제철과 사실상 매각에 합의한 상태고 현대건설 보유 상선주식 매각(290억원)도 즉각 실현이 가능하다.

서산농장(6천억원)과 계동사옥(1천620억원) 매각은 논란의 소지가 남아있다. 서산농장 매각은 현재 토지공사가 `대행'하고 있으나 매매가격 산정과 각종 소요 절차를 감안할 때 6개월 이상의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측은 연말까지 3천억원, 내년 상반기 3천억원의 매각대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매각대금이 6천억원에 달하지 못할 것이란 분석도 있으나 적어도 5천억원 이상의 매각가치를 올릴 것으로 현대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막판 걸림돌로 작용해온 계동사옥은 끝내 `미결'에 그쳤다. 현대측은 이달 말까지 매각계획을 확정짓는다는 설명이지만 상선 등 관련 계열사의 반발 강도로 볼 때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 건설 난관 많다 = 보름전 `시한부 부도유예' 판정을 받았던 현대건설은 이번 추가 자구계획으로 사실상의 `사면조치'까지 기대하는 눈치다. 이미 이행한 자구계획 진도(7천803억원)에다 1조2천억원 추가 자구와 하반기 영업이익까지 포함하면 연말까지 돌아오는 물대(진성어음) 4천500억원과 개인채무 및 해외 차입금 5천억원을 갚고도 700억원이 남는다는 게 현대의 설명이다. 이에따라 연말까지 자구계획이 `순항'한다면 연말까지 총부채를 5조7천억원에서 4조3천억원대로 줄여 ▲채권단 신규자금 지원 ▲신용등급 상향조정 등의 `숙원'을 풀 수 있을 것으로 현대측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이 더욱 큰 문제다. 증시침체와 돈 가뭄 등으로 시장 자금조달 기능이 회복되지 않으면 유동성 위기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한해만 3조4천900억원(회사채 1조8천억원, 기업어음 2천억원 포함)의 차입금이 돌아오고 여기에 올해말까지 만기연장한 차입금 7천억원을 포함하면 내년에 갚아야 할 돈이 무려 4조1천900억원에 달한다. 1조2천억원의 추가자구와 올해 국내외 영업이익 8천억원을 포함하더라도 1조7천900억원이 부족하다. 결국 건설 스스로 영업력을 극대화하고 이윤창출 모델을 보다 분명히 제시, 시장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또 다시 부도위기에 내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내년도 건설경기가 회복된다고 보기
힘든데다 더 이상 계열사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어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 전자는 계열분리, 금융은 매각 = 그룹은 앞으로 1년 안으로 주력업종별로 자진 해체한다는 큰 틀의 `설계도'를 제시했다. 이는 정부의 재벌해체 정책에 부응하는 동시에 현대건설과 계열사간 `부실'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볼수 있다. 전자.중공업은 내년까지 계열분리를 완료하고 금융부문은 완전 매각한다는 것이 발표의 골자다.

현대전자는 내년 상반기까지 계열분리한다는 그림이 나왔다. 매각 형태와 달리그룹과의 `느슨한'연결고리를 맺는 `독립기업' 구도로 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그룹과 전자간의 `부실이전'을 차단하는 동시에 MH의 입김을 살려놓는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전자의 창업주나 다름없는 MH의 애착이 반영돼있는 것으로 보인다. MH(1.7%)와 상선(9.25%), 중공업(7.01%) 지분을 모두 합쳐 공정거래법상 계열분리 요건인 3%미만으로 낮춘 뒤 매각지분을 현 경영진에 우호적인 국제 컨소시엄에 양도하겠다는 계획이다.

금융부문은 매각쪽으로 확실한 방향을 잡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실때문에 그룹이 흔들리고 대주주가 부실책임을 떠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MH의 의지가 반영됐다. 결국 현단계에서는 미국 AIG그룹과의 외자유치를 통한 경영권 포기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면합의를 통해 경영권을 유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 그룹 새판짜기 = 금융부문 매각에 이어 내년까지 중공업.전자부문이 계열분리될 경우 현대그룹은 건설과 상선을 주축으로 재편될 전망이다. 이는 대북사업과 해외사업을 중심으로 5∼6개사만이 잔류하는 `미니그룹'으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나머지 비주력계열사인 종합상사, 생명, 기술투자, 선물, 정보기술, 이미지퀘스트(모니터생산) 등은 매각 또는 분사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 MH 경영복귀.그룹지배 영향력 강화 = 이번 현대사태를 통해 MH는 사실상 경영일선으로 돌아왔다. MH는 "(현대건설)이사회 결의에 따르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사실상 경영복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건설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한 사외이사들이 `MH 경영복귀'를 주창하고 나서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건설사태를 계기로 대주주로서 권한과 책임을 행사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그룹 내부의 여론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MH와 함께 동반퇴진 대상이었던 정몽구(MK) 현대자동차 회장이 계속 경영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도 MH의 경영복귀를 서두르게 하는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MH는 경영복귀후 그룹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MH는 사재출자를 통해 건설을 장악하고, 나머지 계열사인 중공업, 전자, 증권 등은 상선 지분을 매개로 지배하는 이원화된 지배구도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자구계획안에서 건설이 상선지분 8.7% 전량을 매각함으로써 건설과 상선은 사실상 분리됐다. 이는 정부가 요구해온 사실상의 `현대건설 계열분리' 효과를 거둔 셈이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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