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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없는 이들이, 창덕궁을 보았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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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국시각장애인여성회 소속 장애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서 점자로 특수 제작된 창덕궁 지도를 손으로 만져보고 있다. 이날 시각장애인 38명이 고궁을 찾았다. [김도훈 기자]

20년 전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양쪽 시력을 잃은 권수태(64·여)씨. “창경궁 모습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떠오르고 있어요.”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앞에서 고궁을 둘러보러 온 권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40년 전 벚꽃 흩날리던 봄날, 지금의 남편을 만나 수줍게 첫 데이트를 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흘러간 세월만큼 푹 꺼진 눈시울이 붉어졌다. 권씨는 “앞이 보이지 않은 뒤로는 발을 내딛기가 무서웠지만 오늘은 같은 고충을 겪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이날 창덕궁을 찾은 한국시각장애인여성회 소속 1급 시각장애인 38명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이들의 고궁 나들이에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 3명이 동행해 안내를 맡았기 때문이다. 안내를 맡은 조인찬(59)·임은주(54·여)·신영균(50)씨는 모두 1급 시각장애인이다. 이들 3명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특수 제작한 점자 지도를 나눠줬다.

 창덕궁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후원(後苑). 해설사 신영균씨가 위에서 내려다 본 부용정의 지붕 모양을 설명했다. “도우미께서 회원분들의 손바닥에 열십자(+)를 그려주세요”라고 말했다. ‘ㄷ’자 모양의 불로문을 지날 때는 회원들이 한 번씩 만져 보게 했다. 신씨는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2004년 후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설명한다”며 “같은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이 느낄 수 없는 고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줘 기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문화관광해설사인 신영균씨(오른쪽)가 창덕궁 인정전을 소개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것에서 재미를 발견한다. 해설사가 팔자걸음 모양으로 설치된 바닥의 돌을 설명했다. 박순례(68·여)씨는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한발한발 내딛으며 “진짜 팔자네. 웃긴다 정말”이라며 크게 웃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나무를 직접 더듬어가며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수십 번도 넘게 고궁을 방문한 해설사 3인방은 도우미의 지원이 필요 없을 만큼 관람 동선과 지형까지 완벽히 익혔다. 박씨는 “해설사가 정말 눈에 보이는 것처럼 말해서 우리 같은 장애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5년 전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은 이현정(47·여)씨는 “시각장애인이 뭘 볼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마음속에서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3년 전 딸과 함께 다녀왔던 일본의 오사카 성(城)도 그의 마음속에는 선명히 남아 있다.

 종로구는 장애인 일자리 마련과 장애인의 눈높이에 맞는 관광 해설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난해 3월 시청각 장애인 해설사 양성 사업을 시작했다. 모두 17명의 장애인 해설사가 지난해 가을부터 장애인 한두 명씩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가이드를 해왔다. 청각장애인에게는 수화로 설명을 한다. 단체 관람을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참여를 원하는 장애인과 관련 단체는 종로구에 신청하면 장애인 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며 “장애인도 문화 시설을 불편 없이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최종혁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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