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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가, 당신을 보고 있는 바로 옆 보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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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36면

금, 원소기호 Au, 원자번호 79, 원자량 196.9665.
몇 가지 산업적 용도와 치과용으로 쓰이며, 오래전부터 주화 재료로 인기 있었고, 장신구의 매력적인 재료가 된다.
하지만 이 노란색 금속 고체에 본질적인 가치는 하나도 없다. 필수품도 되지 못하고, 화폐가치에서도 항상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금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금만 보면 황홀해하고 금을 모으는 데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희곡 ‘인색한 기사’에서 금이 주는 정신적인 만족감을 극명하게 그려냈다. 말라버린 빵 껍질과 물만 먹으며 돈을 모으는 늙은 남작은 지하실 궤짝에 쌓아둔 황금을 바라볼 때마다 희열과 쾌감을 느낀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9>『사일러스 마너』와 조지 엘리엇

“나는 온종일 기다린다. 내 은밀한 지하실에 내려갈 순간을! 궤짝을 열 때면 언제나 흥분과 전율이 느껴진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가슴을 죄어온다. 오, 여기 나의 지극한 행복이 있다! 오늘은 나만의 향연을 베풀리라. 궤짝마다 앞에 촛불을 켜고, 모든 궤짝을 열어젖히고, 그 안의 번쩍이는 덩어리를 바라보리라. 나는 황제다! 이 얼마나 매혹적인 광채인가!”

조지 엘리엇의 소설 『사일러스 마너(Silas Marner)』의 주인공 마너 역시 이런 인물이었다. 성실한 아마포 직조공 마너는 친구의 배신으로 도둑 누명을 쓰고 고향을 떠나 래블로로 이주한다. 실 짜는 거미처럼 휴일도 없이 베틀에 앉아 일만 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옷감을 짜서 벌어들인 금화를 보며 향연을 즐기는 것이다.
“금화가 검은 가죽부대에서 쏟아져 나올 때면 얼마나 밝게 빛나던가! 그는 그 돈을 모두 사랑했다. 금화를 수북이 쌓아놓고 그 속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올리며 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15년간 이웃과의 교류도 없이 고립된 채 살아가던 그에게 큰 변화가 닥친다. 금화를 도난당한 것이다. 그는 상실감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덕분에 이웃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한다. “마너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경우란 없어요.”

며칠 뒤 그는 자신의 오두막 난롯가에 잠들어 있는 두 살배기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아이의 반짝이는 금발 곱슬머리를 금화로 착각하고 순간적으로 들떴던 마너는 그 아이의 엄마가 죽고 아버지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습니다. 문이 열려 있었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돈이 가버렸고, 역시 알 수 없는 곳에서 이 아이가 왔답니다.”
마너는 이 아이가 저 머나먼 날의 삶에서 그에게 보내진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차가운 금화 대신 에피를 딸로 키우며 자기를 버렸던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연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던 금화, 그래서 꼭꼭 잠긴 고독 속에서 숭배했던 금화, 새소리도 듣지 않고 사람의 노래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던 금화와 달리 에피는 끊임없이 그를 불러내고 일깨워주었으며, 햇빛과 소리, 살아있는 움직임을 찾아다니며 기뻐했다.”

이제 그는 새로 번 돈을 만져도 예전처럼 만족스러운 전율이 느껴지지 않았다. 돈 버는 일을 목표로 했을 때 그는 고립되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금 더미가 없어지자 비로소 사랑을 발견하고 인간성을 회복한 것이다.

“옛날에는 천사가 나타나 사람들의 손을 잡고 파멸의 도시 밖으로 인도해 주었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천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파멸의 위험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 구원의 손길은 사람들을 밝고 조용한 땅으로 부드럽게 인도해 준다. 그리고 그 손은 어린아이의 손일 수도 있다.”
에피를 버렸던 친아버지가 찾아오지만 에피는 마너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마너는 말한다. “자기에게 찾아온 복을 문간에서 걷어차면 그 복은 기꺼이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로 갑니다.”

마너는 마지막으로 고향 마을을 찾아간다. 그런데 다 사라지고 없다. 자신이 누명을 썼던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엘리엇은 윈스럽 부인의 입을 빌려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이 세상에는 고통도 많고, 뭐가 옳은지 알 수 없는 일도 많답니다. 수많은 일의 진상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도 하늘의 뜻이겠죠. 마너씨, 당신은 한때 어려운 일을 당했지요. 당신은 절대 그 뜻을 모를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과 제가 모른다고 해서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 할 수 없죠.”
16년이 지나 잃어버렸던 금화를 되찾지만 마너에게 그것은 더 이상 보물이 아니다. 그렇다. 찾기 위해 고생하고 위험을 무릅쓸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보물, 그것만이 진정한 보물이다. 당신은 아직도 눈부신 보물을 찾아 밤낮 헤매고 다니는가? 진짜 보물은 바로 옆에서 지금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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