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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 통해 역사소설 새 지평...91세에도 펜 잡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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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35면

소설가 김성한. [사진 중앙포토]

김성한(1919~2010)은 195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면서도 다른 ‘50년대 작가’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50년대 작가’ 가운데서 그는 1910년대에 태어나고, 일제 치하에서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서른이 넘어 등단한 유일한 작가였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51> 집념의 작가 김성한

그뿐 아니라 다른 50년대 작가들이 6·25전쟁을 겪은 이후의 이념 갈등이나 전후의 부조리 같은 당대의 현실을 꿰뚫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김성한은 풍자적 기법에서 신화나 우화를 차용하는 기법에 이르는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 인간과 삶의 여러 가지 모습에 천착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가 4반세기에 이르는 언론계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일련의 역사소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김성한은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풍산개’로 유명한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났다. 함남중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야마구치 고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 광복을 맞아 졸업을 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몇몇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 역사적 관심을 학문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형상화해 보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명로’가 당선돼 등단한 김성한은 전쟁이 끝난 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선다. ‘암야행’ ‘제우스의 자살’ ‘귀환’ 등으로 주목을 끈 뒤 56년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을, 58년 ‘오분간’으로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55년부터 ‘사상계’의 주간으로 재직하다가 58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발을 디딘 것은 작가로서 김성한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81년 언론계 생활을 청산하기까지 그가 내놓은 소설은 역사소설 두 편뿐이었다. 두 편 모두 휴직 기간에 쓴 작품들이었다. 하나는 60년대 초 영국 맨체스터대 대학원에서 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쉬는 동안 쓴 3부작 역사소설 ‘이성계’, 다른 하나는 75년 ‘동아·조선 사태’로 신문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쓴 장편 역사소설 ‘이마’였다. ‘이마’는 조선조 중기의 당쟁과 세도정치의 폭력에 저항하는 퇴계와 그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이들 두 작품은 그가 80년대 이후 주력하게 되는 역사소설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비록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지는 않았지만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역사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역사소설을 쓰려면 고증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소설들이 대개 픽션과 상상력을 중요한 도구로 삼아왔음을 감안할 때 그의 역사소설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가치관을 학문적 안목으로 재해석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80년대 초부터 ‘왕건’ ‘임진왜란’은 그렇게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고, ‘요하’ ‘진시황제’ 등으로 이어졌다.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김성한은 문단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월남한 동향의 문인들이나 ‘50년대 작가’들과는 비교적 자주 어울렸으나 문단의 이런저런 행사에는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60년 4·19혁명 후 문단이 한국문학가협회와 한국자유문학자협회로 갈라졌을 때 두 단체는 지연·학연 따위를 내세워 김성한을 자기 단체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으나 김성한은 어느 쪽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도권 문단은 말할 것도 없고 반체제 문학운동에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그가 지닌 올곧은 문학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듯 일평생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으나 김성한의 개인생활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큰아들이 한창 나이에 사망하는 등 가정적 불행이 겹쳤는가 하면, 그 자신의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어서 심장수술과 폐암수술을 받는 등 여러 차례 심각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가 그런대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재혼한 부인인 불문학자 남궁연(전 가톨릭대 교수)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남궁연은 김성한이 40년대 후반 인천여중 교사였을 때의 제자로 첫 아내와 사별한 후 84년 재혼했다.

아무튼 병약했던 그가 90세를 넘겼을 때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8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지팡이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었고, 사물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시력이 극도로 악화했으나 그는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는 90세에 이르러서도 2년여에 걸쳐 월간지에 ‘야화동서(夜話東西)’라는 제목의 역사 이야기를 연재했다. 그의 집필은 91세 되던 2010년 초까지 계속되다가 운신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붓을 놓았다.

세상을 떠난 것은 그해 9월 6일이었다. 김성한은 “죽으면 화장해 유골을 동해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으나 ‘어머니(남궁연) 생존해 계실 때까지만’이라는 자식들의 간절한 뜻에 따라 파주 이북5도민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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