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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서 "국수를 내놓아라" 호통…못난 왕들 인기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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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SBS ‘옥탑방 왕세자’

#조선의 왕세자가 2012년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그는 편의점 창밖에서 김이 솔솔 나는 컵라면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급기야 편의점 점원에게 “저 국수를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다.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 즉위 직전 자신과 닮은 거지와 신분이 바뀐다. 왕은 거지처럼 시전(市廛)을 돌아다니며 밑바닥 삶을 경험한다. 반면 충녕대군과 닮은 노비 덕칠은 세자로 위장해 왕의 행세를 한다.(하반기 개봉 예정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

 왕은 왕인데 이상하게 못났다. 왕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부쩍 늘었지만 하나같이 부족한 인물이다. 첫사랑 때문에 울부짖고(MBC ‘해를 품은 달’), 갈 곳이 없어 옥탑방에 얹혀살고(‘옥탑방 왕세자’), 왕권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날라리 속물(MBC ‘더 킹 투하츠’)이다. 영화 속 왕도 엇비슷하다. 개봉 예정인 ‘조선의 왕(가제)’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두 편 모두 왕과 노비가 신분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못난 왕의 출연을 반기고 있다. 왕의 사랑 이야기인 ‘해를 품은 달’은 42.2%(AGB닐슨 전국)라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러시아 공관으로 쫓겨간 고종 황제의 죽음을 다룬 미스터리 영화 ‘가비’도 선보였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에 이상기온 현상이다. 혁명과 개혁의 주체로서 강철 같은 리더십을 보여 주던 예전 임금은 사라졌다. 대신 절대권력과 동떨어져 있거나 권력의지가 없는 왕들이 사랑받는다. 1996, 2000년 총선 때는 ‘용의 눈물(KBS)’과 ‘태조 왕건(KBS)’이, 2007년 대선 때는 ‘이산(MBC)’ 붐이 불었던 것과 다른 양상이다. 한창 권력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때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MBC ‘더 킹 투하츠’

  ◆왕이 별건가?=윤석진 드라마 평론가는 “정치가 일상화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한국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누구나 쉽게 정치에 참여한다. 대통령과 소수 엘리트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은 시민에게 넘어가려 하는데 ‘왕만 최고’인 드라마가 대중에게 어필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윤석진 평론가는 “지금 시청자들은 왕이 백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교조적이고 계몽적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왕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로맨스나 코미디가 주재료가 되고 정치 이야기가 양념처럼 끼어드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영웅’에 속았다=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못난 왕으로 표현됐다는 분석도 있다. 예전 선거정국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는 난세의 영웅을 다뤘다. ‘태조 왕건’과 ‘용의 눈물’은 각각 통일신라와 고려 말기 어지러운 정국을 해결하고 새 시대를 여는 왕의 이야기였다. 2007년 ‘이산’ ‘한성별곡(KBS)’ 등 정조 붐이 불었을 때도 왕은 ‘개혁’을 일궈 내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1997, 2007년 두 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새 시대를 열기 바랐던 국민의 열망과도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국민은 이제 ‘영웅’ 혼자서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정덕현 드라마 평론가는 “사극 속에서 영웅이 사라지고 정치가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기존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대세는 위민(爲民)정치=지상으로 내려온 ‘왕’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유독 민생 체험을 즐긴다는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가상의 왕 이훤이나 ‘뿌리 깊은 나무(SBS)’의 세종은 변복을 하고 자주 시찰을 나갔다. 백성의 삶에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선거철에만 시장을 찾아 민생정치를 하는 우리네 정치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윤석진 평론가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권력 투쟁을 벌이기보다 국민 속에서 민생정치·일상정치를 하는 리더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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