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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여자의 무거운 가방 대신 들어주는 당신 … 매너 있는 남자 맞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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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여행용 가방을 든 선남선녀가 하나 둘 ‘애정촌’이란 이름의 합숙소에 도착하면서 프로그램의 막이 오른다. 한 텔레비전 방송의 짝짓기 프로그램 얘기다. 여성 참가자가 등장하면 먼저 도착한 남성 참가자 중 한 명이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가방을 대신 들어주기 위해서다. 여성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당연한 듯 가방을 건넨다.

 남성 참가자가 여성의 가방을 들어주는 것은 여성에 대한 호감의 표시일 수 있다. 매너 있는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는 성(性)차별적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여자는 남자가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약자라고 보는 남성우월적 편견일 수도 있다. 스스럼 없이 가방을 맡기는 여성도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보긴 어렵다. 호의를 무시하는 차가운 여자로 비치기 싫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힘을 쓰는 일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 아닐까.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 트렁크를 들고 낑낑대는 여성을 발견하고 모처럼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별로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는데도 눈치 없이 계속 도와주려 하자 단호하게 “노(No)”라고 거절하는 게 아닌가. 양성평등의 천국인 북유럽에서는 여자가 먼저 청하기 전에 남자가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치한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라고 한다.

 스칸디나비아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이 약자라는 느낌을 받는 행동을 불쾌하게 여긴다. 정신적인 것은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그렇다. 육아와 가사에서도 남녀 구별이 없다. 남자도 1년씩 육아휴가를 얻어 여자와 번갈아 가며 아이를 키운다. 주방은 남녀의 균등한 생활공간이다. 전통적인 성 역할의 경계가 사라져 남자 직업과 여자 직업이 따로 없다. 국회의원과 장관의 절반이 여성이다 보니 여성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북유럽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도 몰라보게 변했다. 가정의 주도권은 이미 오래전 여성에게 넘어갔다. 아들딸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키우다 보니 공부는 물론이고 싸움마저 남자 아이들보다 잘하는 ‘알파걸’이 넘쳐난다. 판검사나 외교관은 이미 여성 합격자 수가 남성을 앞지르고 있다. 어울리는 짝을 찾지 못해 결혼을 늦추는 ‘골드미스’도 급속히 늘고 있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긴 하지만 여야 주요 정당 대표는 여성이 도맡고 있다.

 이런 추세면 결혼식 주례를 여성이 맡고, 신랑의 엄마가 아들 손을 잡고 입장해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고 신부에게 말하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애정촌에 도착한 연약해 보이는 남자의 가방을 여자가 대신 들어주는 장면이 나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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