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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여성 공천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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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정애
정치부문 차장

진수희·나경원·이혜훈. 이른바 잘나가다 근래 주저앉은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이다.

 지금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이 한 공간에 있을 때가 있었다. 2002년 여의도 의사당대로변에 있는 ‘호화 당사’ 시절이었다.

 나경원 의원은 판사직을 내놓고 정계에 입문한 ‘특별한’ 경우였다. 지금도 판검사 출신이 정치권으로 직행한 게 화제가 되니, 10년 전 어떠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특보단 일원이 됐다. 최경환·김정훈·서상기 의원이 특보 동료였다. 남성들은 다 전공을 살린 그럴싸한 직함을 받았다. 경제나 법무·과학기술 등으로 불렸으니 말이다. 나 의원은 여성 특보였다. 특보인데 성별이 여성이란 의미인지, 여성 담당이란 건지 다들 헷갈려 했다. 여성계 출신의 명실상부한 여성 특보가 두 명 있었던 데다, ‘여성’이 아닌 수식어가 붙은 나머지 특보 30여 명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이혜훈 의원도 그즈음 나타났다. 경제학 박사인 그도 정책특보단의 일원이 됐다. 그러나 그저 특보였다. 수식어가 없었다. 사회학 박사 출신인 진수희 의원은 여의도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유승민 당시 소장을 돕고 있었다.

 대부분 영입 케이스로 꼽히곤 했던 이들의 출발은 이처럼 그저 그랬다.

 사실 그 무렵 한나라당에선 여성 정치인이랄 만한 인사가 없었다.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오랫동안 여성계에서 여성 정책을 다루거나 여성운동을 했던 이들은 대부분 반대 당을 택했고, 남성들과 학생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경험을 공유한 때문에 쉽게 주류로 편입되곤 했다. 한나라당은 풍토가 달랐다. 정치인 중 여성은 대부분 최고 권력자와 가깝거나, 아니면 그의 부인과 가까웠다. 한 여성 중진 의원이 화장실에서 권력 실세 아내의 가방을 들고 서 있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식 얘기가 술자리 안줏거리가 되곤 했다. 한나라당 여성 정치인은 부인 정치란 독특한 공간에 머무는, 당과는 유리된 섬 같은 존재였다.

 이들 의원부터 달랐다. 각자 전문 영역이 확실했다. ‘영입’됐다곤 하나 밑부터 밟아 올라갔다. 2002년 대선 패배 이후에도 대부분 당을 지켰고 야당 시절을 감내했다. 2004년엔 의원 배지를 달았다. 정치개혁 차원에서 여성 공천을 의무화하기로 하면서였다. 진수희·나경원 의원은 비례대표로, 이혜훈 의원은 지역구로 국회에 진출했다.

 이후 이들은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떠올릴 수 있는 정치인이 됐다. 299명 중 그런 ‘호사’를 누리는 의원이 몇 명 안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주목 받는 활약상이랄 수 있다.

 그런데도 모두 공천을 못 받았다. 이유는 다양하다. 진수희 의원의 지역구(서울 성동갑)는 전략공천지가 됐다. 진 의원에게 공천을 안 주기 위해서였는데 복지장관을 했다는 게 한 이유인 모양이다. 전임자인 전재희 의원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다른 연유가 있는 게 틀림없다. 이혜훈 의원의 경우 “비례대표성 지역구(서울 서초갑)에 내리 세 번 공천 받는 게 어디 있느냐”는 이유다. 서울 강남과 다를 바 없는 영남의 재선 이상 남성 의원들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 의원에겐 다른 논란도 있지만 지난해 서울시장 보선 패배 책임을 물은 측면도 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했던 책임을 묻는 이는 없었다.

 정치인으로 제 몫 하기엔 시간이 걸린다. 조직 경험이 상대적으로 덜한 여성은 더 그렇다. 반면 여성의 정치적 역할 공간은 확대되고 있다. 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다.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판에 새누리당은 이들을 포함, 정치적 단련 과정을 거친 여성 정치인들을 줄줄이 내쳤다. 게다가 그 방식이 감정 소모적이었다. 당사자들이 “미운 털이 크게 박힌 모양”(진수희)이라고 하소연할 정도이니 말이다. 일각에선 “공천을 주도한 영남 마초들이 평소 껄끄러웠던 여성 동료를 배제, 당 중진이 될 싹을 잘랐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할 때 여성부를 없애려 해 반여성적이란 비판을 들었다. 환골탈태했다는 새누리당은 다를까. 공천만 놓고 보면, 거기가 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