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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아름다운 내 아들, 유지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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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어려움 딛고 아들을 스타로 키우기 까지 중학교 시절 4년간 신문배달을 했다는 강남 소년 유지태.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경험하기까지 어머니 김봉희씨의 남모르는 교육이 있었다는데 …. 김봉희씨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톱스타로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생한 얘기를 하자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네요. 속 모르고 그저 편하게 살아온 줄만 아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제껏 우리 모자가 겪어온 일들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이겨냈나 싶기도 해요.”

영화배우 유지태의 어머니 김봉희씨(51세·일산 백병원 간호과장)
. 외아들을 촉망받는 스타로 키워냈으니 일부러 자랑을 늘어놓을 만도 하련만 가족사를 털어놓는 것은 애써 피하려 했다. 가슴 한켠에 묻어놓은 아픈 옛 상처를 들추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린 시절 서울 강남에서 자란 유지태는 시쳇말로 ‘강남 애’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연이은 부모님의 이혼 등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김씨의 말대로 “말을 하자면 끝도 없는 얘기가 나올 만한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강남 애들은 옷도 잘 입고, 좋은 신발 신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러나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지태는 거의 동대문에서 옷을 사입히곤 했어요. 그러니 기가 죽을 만도 한데 지태는 그런 내색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속이 깊은 아이인지 몰라요.” 김봉희씨는 어린 지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자식을 홀로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고통보다는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운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김봉희씨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김봉희씨는 경북 대구 출생으로 경북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7남매 가운데 장녀로 자라서인지 젊은 시절엔 욕심이 대단했다. 당시 그녀는 미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면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미국행을 준비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던 해 71년 서울로 상경해인 경희대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10월쯤일 거예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남편을 만나게 됐지요. 서로 첫눈에 반했어요. 2년 동안 열렬한 사랑을 했어요. 남편과는 나이 차이가 열살이나 났어요. 쉽게 말하면 발목이 잡힌 것 같아요. 미국에 갈 생각도 포기하고 결혼을 했으니깐요.” 처음에는 나이 차이가 사소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괜히 손해를 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면서 웃음을 짓는 그녀. 결국 김봉희씨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유지태를 낳았다. “남편 집안이 좋았어요. 시아버님이 신민당 시절 국회의원도 지내신 분이셨구요. 엄한 가풍이었지만 형제간의 우애도 대단했던 것 같아요. 남편은 둘째였지만 부모님을 모시다시피 할 만큼 효심도 깊었고 사업 수완이 좋아서 돈도 잘 벌었구요. 결혼 초는 참 행복했어요.”

70년대 당시 신흥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강남의 해청아파트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 때만 해도 남부러울 것 없을 만큼 풍족했다. 시아버지는 정치를 하는 분 답게 정열적인 활동을 했고, 남편의 사업도 순탄했다. 김씨 역시 전공을 살려 간호사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지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시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시고 말았지요.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 남편의 사업도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건축업이다 뭐다 이것저것 사업을 많이 했거든요. 일이 안 풀리나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났어요. 빚 독촉에 시달린 남편은 그때부터 아는 사람이 없는 지방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당시가 김씨 모자에겐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한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살다 갑작스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렇다치더라도 빚독촉에 시달려 남편이 자주 집을 비우는 등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지 못한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몇 년간 홀로 아들 지태를 키우던 김씨는 급기야 이혼을 결심했다. “지태가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거예요.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이었는데, 나쁜 일이 연이어 터지니까 저도 모르게 마음이 멀어지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지태한테 큰 잘못을 한 것 같아요. 내 욕심 때문에 어린 마음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서요. 다행히 속이 깊은 아이라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의 좋고 나쁜 얘기를 다 알면서도 내색을 안 한 것 같아요.”

김씨 모자는 강남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자그마한 셋집을 얻었다. 햇볕이 들지 않아 축축한 습기가 가득한 지하 단칸방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투덜대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이전까지 연탄을 갈아본 적도 없는 아들이 먼저 연탄 가는 순번을 정하자는 제안을 꺼낼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히 자기에게 마음을 쓸까봐 걱정을 해서 였던 것 같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니까 사람이 독해지더라구요. 직장에 나가서는 웃는 얼굴로 환자들을 대하다가도, 집에만 돌아오면 혹독한 엄마가 됐어요. 아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이혼을 했는데 누굴 의지하겠어요? 믿을 사람이 지태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혼 당시에는 남편 원망을 많이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일이 안 풀린 탓에 둘 사이가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속 좁은 마음에 너무 쉽게 남편을 떠나 보냈다는 후회가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아들 지태에게 “못할 행동”을 많이 한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이다. “중학교 때면 예민한 시기잖아요. 엄마로서 못할 짓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못된 엄마였던 셈이죠.

사춘기 땐데 지태를 위로해주기는커녕 제 기분대로 화풀이도 많이 했거든요. 다행이 천성이 고운 지태는 묵묵히 다 받아주었어요. 그래도 얼마나 속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겠어요.” 김봉희씨는 유지태의 사춘기 시절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린다. “아니오”라는 대꾸 한번 없던 착한 아들을 떠올리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낮과 밤이 바뀌는 직업의 간호사 엄마를 둔 탓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도 삐뚤어지지 않은 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처음 인터뷰를 꺼렸던 이유도 자신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엄마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들이 스타가 된 게 마치 자기 공인 양 말하는 것이 혼자 힘으로 세 상을 견뎌낸 아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지태가 중학교 때 2년 정도 신문배달과 우유배달을 했어요. 경제적인 어 려움 때문에 신문배달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친구를 돕기 위해서였어요. 지금도 저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는, 지태하고는 둘도 없는 친구지요. 그 아이 아버지가 은행의 고위직에 계시던 분이셨는데, 빚 보증을 잘못 서서 그만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그 친구네 집을 돕겠다며 신문배달을 시작했어요. 저희 가족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제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잖아요. 지태가 그런 아이예요. 자기가 어려워도 남을 돌볼 줄 아는 아이였죠. 글쎄, 걔가 누굴 닮았는지 몰라(웃음)
.”

스타가 되면 건방지게 구는 사람도 있다지만, 자기 아들만은 초심을 잃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너무 아들을 믿는다고 누군가 한마디 했지만,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것 같단다.

“중학교 3학년때 였어요. 둘이서 기차 여행을 떠났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창 밖을 보고 있는데, 지태가 갑자기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엄마, 나 너무 힘들었어요. 어떤 때는 엄마가 왜 나를 낳았나 원망을 한 적도 있어요. 엄마, 저를 한번 믿어보세요.’라고 하더군요. 지태가 속마음을 털어놓은 게 처음이었어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더라구요. 내가 큰 잘못을 하고 있구나, 이러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김봉희씨는 그제서야 아들이 다 자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로만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엄마의 속내를 염려할 만큼 훌쩍 커 있었다. 김씨는 그때 이후 자신의 욕심대로 키우기보다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나한테 마음의 문을 탁 닫아버린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 사건 이후로 참 잘해준 것 같아요.

지태야 뭐 워낙 못된 엄마라고 생각했으니 잘해주는 걸 느끼지도 못했겠지만요. 아들 의견을 존중하고, 모든 일을 서로 상의하면서 해결하려고 했어요. 가끔 엄마가 아들한테 혼이 나기도 했구요(웃음)
.”

외아들에게 의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일까. 병원에서 근무하다보니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의외로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다는 말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남 보기에 번듯한 직업을 가지면 좋으련만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 연예인이라니…. “고등학교 3학년 초였어요. 연극영화과 아니면 공부를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엄마들의 생각이 다 그렇잖아요. 연예인이라면 왠지 밥도 제대로 못 벌어먹을 것 같고, 또 유명해지면 못된 사람이 될 것 같고…. 솔직히 유명하지 않아도 걱정, 유명해도 걱정이 되겠더라구요(웃음)
. 얼마 동안 다시 생각을 해보라고 했어요. 그리곤 한 달 후에 다시 물었더니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대요. 그래서 못 이기는 척 해보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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