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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다시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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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종수
논설위원

마침 딱 잘 걸렸다. 지난달 9일 고리원전 1호기에서 일어난 정전사고 말이다. 점검 과정에서 빚어진 사소한 실수가 비상 발전기가 가동되지 않는 비상 상황으로 번졌다. 원자로에 전기 공급이 끊기면 가동을 멈춰도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중대 사고가 벌어질 위험이 있다. 비록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는 충분한 사고였다. 여기다 사고 발생 사실을 한 달간 조직적으로 숨긴 사실은 불안감을 분노로 바꿔놓고 있다. 여기서 한발만 더 나아가면 원전 반대의 촛불시위라도 벌어질 판이다.

 이미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시민·환경단체들은 고리원전 사고 관계자를 고발하는 한편, 문제가 된 고리 1호기의 가동 중지 가처분을 요구하는 재판을 벌이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원전 확대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과학기술 분야의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겠다는 총선 공약을 내놨다. 추가 원전 건설과 원전 비중 확대를 골자로 한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원점에서 다시 보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를 재임 중 핵심 치적으로 꼽는 게 못마땅하던 차에 고리원전 사고가 일어나자 정부의 원전 정책을 싸잡아 깎아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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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동일본 대지진 1주년을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인재(人災) 가능성은 고리원전 사고의 위험성을 대비시키기에 그만이다.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세계 각국은 원전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거나 아예 탈핵(脫核) 선언을 하는 나라가 급격히 늘고 있다”며 원전 확대 정책을 중단하거나 축소로 돌아설 것임을 내비쳤다.

 실제로 일본과 독일은 원전 가동을 중단하고 앞으로도 원자력발전소를 일절 건설하지 않기로 했다. 세계적으로 봐도 원전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원자력발전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은 주춤거렸다. 스리마일 원전사고 이후 미국이 원전 건설을 중단했고,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원전의 건설과 가동이 모두 확연히 정체됐다. 여기다 후쿠시마 사고까지 터지자 일본과 독일은 원전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국민적인 결단을 내렸다. 정치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이다. 전 세계 발전량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드는 추세다. 1996년 18%였던 원자력의 비중이 2010년에는 13%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스리마일 사고 이후 30년 만에 원전 건설을 재개했다. 만성적인 전력난에 시달리는 중국도 야심찬 원전 확대 전략을 멈출 기색이 없다. UAE와 터키 등도 예정대로 원전을 건설할 계획이다. 원전 의존도가 높고 원전 기술의 주요 수출국인 프랑스 역시 원전 가동을 멈출 생각이 없다.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력 생산의 경제성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석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의 공급이 불안정하고 가격이 오르는 가운데 대체에너지로 거론되는 신재생에너지가 아직은 경제성과 효율성 면에서 원전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원전 의존도를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싸고 깨끗한 에너지원(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기존 원전을 개보수하는 한편,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화력발전소를 원전으로 바꿔나갈 작정이다. 환경을 생각한다고 해서 무작정 원전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오히려 환경을 생각해 화력발전 대신 탄소 배출이 거의 없는 원전을 택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원전 확대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전체 발전량의 31%인 원자력의 비중을 2030년까지 59%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아직도 전기 수요가 계속해 늘어나는 바람에 여름철과 겨울철마다 전력대란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원전 1기만 가동이 중단돼도 전력예비율이 바닥을 드러낸다. 앞으로 늘어날 전력 수요를 감안하면 지금 당장 발전소의 추가건설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원전을 짓지 않으면 태양광이나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들 에너지원은 기상여건에 좌우되기 때문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어렵다. 그렇다고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화력발전에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리저리 따져보면 원전만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남는다.

  결국 원전 정책은 국민적 선택의 문제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불문하고 원전에 대한 불신이 크다면 일본과 독일처럼 원전을 포기하면 된다. 물론 여기에는 경제적 부담과 생활의 불편이 따른다. 국민들이 화석연료 수입 비용을 감당하고 불안정한 전력 공급을 감내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원전 가동을 중단해도 그만이다. 다만 정치적 의도로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인위적으로 증폭시키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 국민들의 판단을 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부담과 불편이 싫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길을 가면 된다.

 그러나 원전 정책에 대한 국민적 선택의 대전제는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투명한 정보다. 원전이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한 판단이 서야 원전을 포기할지, 아니면 확대할지를 선택할 것 아닌가. 결국 원전 정책의 핵심은 안전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여부로 좁혀진다. 아무리 값싸고 깨끗하다 해도 사고의 위험성이 크다면 어떤 정부도 원전 확대 전략을 고집할 수 없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고리원전 1호기 정전사고와 은폐 조작은 치명적일 수 있다. 사고 자체도 문제려니와 사고의 은폐로 인해 국민들의 판단 착오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고 그 과정을 얼마나 투명하게 공개하느냐에 원전의 미래가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