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테크닉 … 간담이 서늘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2호 16면

무대 위에는 피아노, 그 앞에는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었다. 분명히 같은 피아노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잘게 쪼개 깃털보다 가벼워진 음들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금속성 빛을 내며 홀 안에 나부끼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내한공연, 12일 성남아트센터

12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있었던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의 두 번째 내한공연 풍경이다. ‘수퍼 비르투오소’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아믈랭은 1961년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 뱅상 댕디 음악학교와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에서 공부했다. 85년 카네기홀 국제 미국 음악경연대회에서 1위를 수상했고, 그 후 독일 비평가상을 여러 번 받았다. 하이페리온 레이블에 전속돼 알캉, 번스타인, 볼컴, 요제프 마르크스, 고도프스키, 리스트, 레거, 슈만, 빌라 로보스, 스크랴빈, 소랍지 등의 협주곡과 솔로곡을 녹음할 정도로 그의 레퍼토리는 방대하다.

아믈랭은 이번 공연에 앞서 2004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했다. 알캉 ‘이솝의 향연’, 리스트 편곡 슈베르트 3개의 대행진곡,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7번, 고도프스키 ‘쇼팽 에튀드 연구’ 등 비범한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애호가들을 매료시켰다.

이번 두 번째 내한공연 첫 곡은 알반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 Op.1이었다. 부동자세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듯한 아믈랭은 복잡한 금속성 기계에 조명과 내시경을 가져다 대고 훑는 듯했다. 머리가 저릴 정도로 현대적인 이 작품에서 그는 ‘21세기의 피아니스트’임을 웅변하며 불확실하고 불안한 음들에 시대의 공기를 주입시켜 확신의 표정을 심어주고 있었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가 이어졌다. 주제를 제시하고 템포와 강약 조절로 대서사시를 이어가는 대곡이다. 음반에서도 보여준 바 있지만, 첫 주제 제시부에서 아믈랭은 객석의 공기를 진공 상태로 만들 만큼 마술에 가까운 집중력을 보여줬다. 타건 하나하나가 명료했으며, 격렬해지는 부분에서는 냉정하면서도 사나웠다. 이따금 눈에 띈 미스터치는 이것이 실황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차라리 인간적인 순간이었다. 중간 부분 이후에서는 더없이 시적인 분위기로 침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산들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것 같은 표현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인터미션 후 아믈랭은 드뷔시 전주곡 2권 중 ‘비뇨의 문’ ‘요정은 예쁜 무희’ ‘바뀌는 3도’ ‘불꽃’ 등 4곡을 발췌해 연주했다. 순간순간 바뀌는 빛과 그림자를 건반의 미묘한 뉘앙스로 포착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아믈랭의 연주는 나른하면서도 유희적인 드뷔시의 특징을 다시 해체해 대리석 조각으로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 곡인 자작곡 ‘12개의 단조 연습곡’ 중 8번, 2번, 7번, 11번, 12번은 기대했던 대로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25년 동안 개정을 거듭한 이 곡은 쇼팽, 차이콥스키 등 작곡가들에 대한 오마주와 고난도 기교가 녹아 있는 아믈랭의 비범한 주옥편이다. 특히 왼손으로만 연주한 연습곡 7번에서는 보통 피아니스트들이 두 손으로도 살리지 못할 만큼의 풍부한 서정성을 보여줘 객석에는 감탄의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앙코르 역시 ‘12개의 단조 연습곡’ 가운데 3번 ‘파가니니-리스트 풍으로’였다. 음반을 들었을 때도 가장 오싹하게 만든 트랙이었다. 힘을 뺀 채 왼손으로는 ‘라 캄파넬라’를, 오른손으로는 카프리스를 동시에 연주하는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피아노의 가공할 테크닉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을 체험한 청중들은 따뜻한 기립박수로 응했다.

아믈랭은 연주여행 중에도 시간이 나면 꼭 악보를 구입해 가는 학구파로 알려졌다. 미국의 음악평론가 헨리 포겔은 아믈랭의 연주를 ‘정확성과 상상력의 변증법’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납득이 가는 무대였다. 아믈랭은 이번 연주를 통해 ‘클래식 음악의 해석에 한계란 없다’는 명제를 각인시키고 떠났다.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