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신동, 아버지 그늘 벗어나자 천재성 활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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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호 23면

1998년 영국 서부 해안에 있는 로열 버크데일에서 열렸던 제127회 브리티시 오픈은 숱한 얘깃거리를 낳았다. 97년 마스터스에서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일궈 낸 타이거 우즈가 3위에 그치고 그의 이웃 사촌이었던 41세의 마크 오메라가 우승하면서 크게 대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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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 세계 골프팬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선수는 아마추어 신분으로 출전해 4위에 오른 17세의 저스틴 로즈(32·잉글랜드)였다. 마지막 날 18번 홀에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러프에 빠진 공을 그린에 올려 버디로 연결시킨 로즈의 플레이는 단연 최고였다. 로즈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1000번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샷”으로 그는 세상에 알려졌다.

로즈의 아버지 켄 로즈는 아들이 다섯 살 때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골프에 흥미를 보이며 11세 때 70타대 스코어를 쳤던 골프 신동 로즈는 아버지 켄의 작품이었다. 독학파 골퍼로서 싱글 핸디캡을 기록한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영국 주니어 무대를 휩쓸던 로즈는 16세부터는 학교를 떠나 골프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17세에 프로로 전향한 이후 그의 모멘텀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로즈는 계속된 예선 탈락의 고통에서 허덕였다. 브리티시 오픈 직후 언론과 골프팬들의 비현실적인 기대와 관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은 큰 실수였다. 그에게 골프는 더 이상 재미있는 운동이 아니라 직업에 불과했다.

지난 12일 캐딜락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저스틴 로즈와 가족. [AP=연합뉴스]

골프를 시작한 이래 또래들과 어울리는 삶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이끌어 주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던 ‘착한 아들’ 로즈는 프로 선수로서의 삶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당시 모든 언론과 골프팬의 비난이 아버지에게 쏟아졌다. ‘지나친 간섭과 극성이 영웅을 제로 상태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는 혹평까지 나왔다. 프로 전향 후 1년 만인 99년 비로소 첫 예선을 통과했으니 그러한 평가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했던 로즈는 서서히 프로 무대에 적응하며 2002년 22세 때 유럽에서 두 차례, 일본과 남아공에서 한 차례씩 우승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최고와 최악이 함께한 시즌이었다. 그의 골프 선생이자 매니저, 캐디였던 아버지가 백혈병으로 그해 9월 세상을 뜬 것이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로즈는 지금의 아내 케이트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펼치게 된다. 2005년부터 짐 로어 박사에게 2년간 멘털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또 한 차례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골프가 전부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골프에 집착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플레이가 잘 되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로즈는 “한 가지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기 위해선 11가지의 긍정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성숙해졌다.

로즈의 깨달음은 큰 결과로 나타났다. 2007년 4개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12위 안에 들며 세계랭킹 6위로 시즌을 마쳤다. 최근 20개월간 PGA 투어에서 4승을 일궈 냈다. PGA 투어에서 션 오헤어(30·미국)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아들을 투자 목적으로 키웠고 상금을 나누도록 한 노예계약서가 알려지며 파문이 일었다. 또 타이거 우즈의 바람기는 아버지 얼 우즈의 여성편력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한국 골프선수들의 일부 ‘극성 대디’ ‘극성 맘’도 이 못지않다.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이기는 것만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골프 대디는 “성적이 나지 않을 땐 맞아야 한다. 그러면 곧바로 좋은 성적이 나온다”고 자랑 삼아 얘기할 정도다. 투어 프로가 된 딸에게 언어적·육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있다.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는 함께 가는 것’이란 핀란드의 교육철학과 로즈의 교훈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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