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盜賊<도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2호 31면

9000명의 졸개를 거느린 대도(大盜)인 도척(盜<8DD6>)이 자신을 교화시키겠다며 찾아온 공자(孔子)에게 따져 물었다. “지금 당신은 문(文)왕과 무(武)왕의 도를 닦고, 천하의 이론을 도맡아 후세 사람을 가르친다고 나섰다. 넓고 큰 옷에 가는 띠를 두르고 헛된 말과 거짓 행동으로 천하의 임금들을 미혹시켜 부귀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도둑 치고 당신보다 더 큰 도둑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찌 당신을 도구(盜丘, 공자를 깎아내려 이르는 말로 구(丘)는 공자의 이름)라 부르지 않고, 나를 도척이라 부르는 것이냐!” 장자(莊子) ‘도척’편에 실린 허구의 이야기다.

漢字, 세상을 말하다

도적(盜賊)의 애초 뜻은 도둑이 아니었다. 도(盜)를 파자(破字)하면 ‘물 수(<6C35>)’와 ‘하품할 흠(欠)’, ‘그릇 명(皿)’이 된다. 흠(欠)은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여기에 수(<6C35>)가 붙으면 ‘침 연(涎)’의 뜻이 된다. 명(皿)은 피(血)를 담은 그릇이다. 한자 도(盜)는 피가 담긴 그릇에 침을 뱉는 모양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중대한 문제가 터지면 제후들이 한데 모여 대책을 논의한 뒤 살아 있는 소의 왼쪽 귀를 잘라 그릇에 담고 피를 돌려 마시며 맹세를 했다. 혈맹(血盟)이다. 혈맹 의식의 사회자인 맹주(盟主)는 우이(牛耳)로 불렸다. 신성한 혈맹의 자리에서 그릇에 침을 뱉는 행위는 공동체를 배반하는 짓이다. 도(盜)는 반역자다. 망명자 역시 도(盜)다. 장자에서 도척이 노(魯)나라에서 추방당해 천하를 주유(周遊)하는 공자를 도구(盜丘)라 비아냥거린 이유다.

한자 적(賊)도 혈맹과 관련이 있다. 패(貝)는 조개류가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제사 도구인 정(鼎)이다. 정에는 중요한 맹서(盟誓)를 명문(銘文)으로 새겨 놓았다. 오른쪽의 ‘병기 융(戎)’은 십(十)과 ‘창 과(戈)’다. 십(十)은 ‘방패 간(干)’의 생략형이다. 융(戎)은 방패와 창이다. 적(賊)은 창과 방패 같은 무기로 맹서의 문장을 훼손하는 모습이다. 역적(逆賊)이란 의미다. 도적(盜賊)은 도둑 이전에 맹서를 깨는 배신자였다.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이가 국군을 ‘해적(海賊)’ 운운해 논란이다. 국가안보를 위해선 0.01%의 도발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군인은 자신의 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이들이다. 적반하장(賊反荷杖)에도 지켜야 할 분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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