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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보금자리주택 '투기'

조인스랜드

입력

[박일한기자]

“당첨만 되면 큰 돈을 벌 줄 알았죠. ‘로또’라고 해서 15년 붓던 청약통장을 써서 당첨됐어요. 그런데 계약금을 마련할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남편 직장도 계약직이고 아이들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당장 생활비도 빠듯하니까요. 남편은 포기한 걸 ‘잘했다. 속이 시원하다’ 하는데 저는 너무 아까워 눈물이 납니다.”

강남권의 ‘반값 아파트’로 꼽히던 위례신도시의 계약을 포기한 신모씨는 요즘 화가 나 잠을 못 이룬다. 그는 2010년 16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용면적 84㎡형에 당첨됐다.

당시 향후 거주의무 기간, 전매제한까지 따지면 12년 정도 뒤를 내다봐야 하기 때문에 보금자리주택 중 가장 넓은 것을 선택했다. 자녀도 셋이나 되니 그 정도 크기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금 사정은 따지지 않았다. 일단 당첨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당첨 가능성을 고려해 가장 인기 있는 주택형에 무조건 청약했다. 사전예약 당첨자로 선정됐을 때는 부자가 된 듯 기뻤다.

지난해 본청약에서 싸질 줄 알았던 분양가가 4억5000여만원으로 확정됐을 때는 조금 불안했다. 2억원도 안되는 전세 보증금에 대출을 보태면 돈은 마련할 수 있겠지만 당장 생활이 걱정이었다.

남편 직장은 불안하고 대출을 무리하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래도 다들 ‘로또’라고 하니 일단 본청약을 포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신씨는 이번에 끝내 계약을 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위례신도시라도 10년 후 집값이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괜히 무리해서 대출을 했다가 두고두고 고생할 것 같았다.

신씨는 “무주택 서민에게 4억5000만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라며 “애초에 당첨만 되면 ‘대박’일 거라는 생각이 잘못됐던 것같다”고 말했다.

위례신도시 보금자리주택 당첨자 가운데 260명이 계약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당첨자의 9%로 비율로 따지면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있지만 그동안 위례신도시의 인기를 고려하면 생각보다 많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신씨처럼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이 가장 많은 계약 포기 이유라고 설명했다.

“서민주택 정책 근본부터 다시 따져봐야”

사실 이 같은 대규모 계약포기는 사전예약 때 예고됐다. 강남권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풀어 짓는 보금자리주택은 당연히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개발비용을 따져 시세보다 싸게 분양한다고 해도 최고 4억5000만원까지 하는 분양가였다. 무주택 서민들이 쉽게 감당할 수준 이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위례신도시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되려면 청약저축 납입액이 최소 1200만원 이상은 돼야 한다.

이는 아무리 짧아도 10년 이상 꾸준히 청약저축을 부어야 채울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런데 장기 청약저축 가입자들은 보통 금융 및 부동산 자산이 넉넉하지 않다.

위례신도시 보금자리주택 당첨자가 대부분 자금 마련에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란 이야기다.

이들은 앞으로 10년 이상 이자를 내가며 버텨야 한다. 경제 상황에 따라 어려움은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로또’라는 환상에 일단 붙고 보자는 심리로 무작정 청약한 무주택자들이 많았을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정부가 무주택 서민에게 능력 이상의 자금이 필요한 주택에 투자하도록 ‘투기’를 조장한 셈”이라고 말했다.

투기 조장까지는 아니라도 최근 정부가 서민주거안정을 위해 내놓는 주택 가운데는 ‘서민용’이라고 하기엔 씁쓸한 것들이 많다.

한채당 수십억원하는 도심 한 복판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한쪽에 들어서는 보증금 1억원 미만의 ‘재개발 임대주택’이라든지, 강남 고가 주택 단지의 4억원짜리 ‘장기전세주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최근 동작구, 흑석동 등 재개발 지역에 지어지는 고급 아파트에 들어서는 재개발 임대주택은 높은 관리비 때문에 입주 대상인 철거민 세입자 등이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고가의 장기전세주택은 정부가 지원할 필요가 없는 계층에게 돌아가고 있다. 이들 주택에는 입주대상자가 당초 정부가 마련한 기준과 달리 선정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두 ‘서민용’이라고 정부가 세금을 동원해 지원하는 주택인데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부가 공급하는 서민주택은 대박 환상을 심어주는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당첨이 됐는데 자금 마련이 걱정이라면 진짜 서민주택이라고 보기 힘들다.

입주후 관리비가 걱정이거나 다른 부자 입주민의 눈치가 보이는 주택이라면 서민용으로 공급하기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분양하는 서민주택이라면 불안한 주거환경에서 벗어나 돈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거주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쁨이 먼저 생기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공급된 서민용 주택 가운데 이런 기본적인 상식에 부합하는 곳은 얼마나 될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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