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묘지 비석, 유골함 널려 있는 '기이한 마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부산 산복도로 일대는 동네의 까치마저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일본인 공동묘지에 집을 짓고, 미군에서 나온 헌책을 팔며 타향살이를 이어가고, 좁은 산기슭에 수천 명이 다닥다닥 모여 살았던 한국전쟁 피란민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피란민이 눈물의 이별사를 썼던 40계단은 이제 젊은 예술가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그 흔적을 하나로 이었더니, 부산의 근현대사가 됐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감천동 문화마을 마을정보센터 하늘마루 전망대에서 내려오다 보면 하늘을 향해 힘차게 헤엄치는 알록달록 물고기 떼가 보인다.

# 1909~45년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얹힌 피란촌 아미동 비석마을

부산에는 비석으로 집을 지은 기이한 마을이 있다.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이다. 사하구 감천동 감천고개에서 서구 아미동 산상교회에 이르는 주변 일대로, 50년대 6·25 피란민이 아미동 일본인 공동묘지에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는 조선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화장장을 이곳 아미산에 모았다. 아미산에서 천마산 사이의 길목에는 그래서 늘 화장장에 바치는 제사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걸 까치가 몰려와 먹었다고 해서 ‘까치고개’라는 이름이 생겼다.

 1909년부터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는 45년 광복 후 방치됐다. 그리고 불과 5년 뒤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피란민 대부분은 자갈치시장에서 얻은 생선상자로 엉성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충북 청주에서 피란 와 아미동에서 53년간 살아온 이호근(74)씨는 “일본은 화장·납골 문화가 워낙 발달해 묘지가 잘돼 있었다”며 “묘를 둘러싼 경계석이 어른 허리 높이었는데, 거기 나무 판자만 얹으면 튼튼한 집이 됐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비석마을에서는 벽이나 바닥에 비석·상돌 등이 박힌 집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일본 가문의 문장이나 묘비명이 아직 선명한 것도 있었다. 후손의 보복이 두려워 한때 묘비명에 시멘트를 덧바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겨울에 구들장을 깔기 위해 묘지 바닥을 들어내다 보면, 집마다 유골함이 두세 개씩 나왔다. 이씨는 “매년 설과 추석 제사를 지낼 때 혼령을 위해 절을 따로 하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 마을 정보 부산 사하구 감천동 감천고개에서 서구 아미동 산상교회에 이르는 주택가 골목에 일본인 공동묘지 흔적이 흩어져 있다. 관광 안내문이나 푯말은 없다. 아미동주민센터 051-240-6541.

# 1960~80년대

일상과 예술의 초감각적 조우 감천동 문화마을

감천동 문화마을 이층집 난간의 반인반조(半人半鳥)조각.

부산의 산토리니. 3년 전 감천동에 문화마을이 형성될 즈음 생긴 별명이다. 마을 어귀 감천고개에서 감천동을 내려다봤다. 건물 외벽에 칠한 푸른색이 그새 많이 바래서, 그리스 산토리니보다는 오밀조밀한 ‘레고마을’이 더 연상됐다.

 원래 감천동은 주민 50~60명이 모여 살던 호젓한 산촌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란민이 들이닥쳤다. 57년에는 부산 보수동 일대에 집단 천막·판자촌을 형성했던 민족종교의 일종인 태극교도 피란민 1000여 세대가 항구 미관상 문제로 일제히 감천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태극도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도시 계획을 통해 감천동은 현재에 가까운 외양을 갖게 됐다. 온 동네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좁은 골목부터 피란민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식수를 받았던 우물터, 태극도 신을 모신 산제당 등 동네 곳곳에서 당시 생활상이 켜켜이 묻어났다.

 60~80년대 더디게 변모해 온 감천동은 90년대를 맞으며 변화를 멈췄다. 산복도로 개발이 공식화되면서 고도가 높은 산동네에서 도로경관을 해치는 고층건물 건립이 통제됐기 때문이다. 감천동 문화마을 개발 초기에는 관광객을 꺼리는 주민도 많았다고 한다. 궁색한 산동네 살림살이를 남에게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2009~2010년 젊은 예술가들이 감천동을 새단장하면서 달동네는 문화마을로 거듭났다. 그들은 예술작품 22점을 마을에 설치했고 고장 난 문, 벗겨진 벽 등 마을경관도 재정비했다. 예술과 일상의 조화도 빼어나다. 마을 입구 평범한 이층집 난간에는 반인반조(半人半鳥)가 떼지어 앉아 있었다. 감천동 마을정보센터를 겸하는 ‘하늘마루’ 옥상에서는 용두산과 부산항, 감천항을 아우르는 부산 전경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 마을 정보 하늘마루(cafe.naver.com/gamcheon2)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감천동 지도 1000원. 사하구 감천동 감정초교(공용주차장 유료 이용) 맞은편에 있다. 070-4219-5556.

1. 중앙동 40계단 중턱에 자리한 또따또가 은공예방 ‘은여우’. 조물조물 섬세하게 빚은 은제품을 팔기도 하고 만드는 법도 가르친다. 2. 일제강점기 일본인 묘지의 흔적이 선연한 아미동 비석 마을에서는 한국전쟁 피란민의 삶이 힘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3. 다시 90년대 이전의 전성기를 꿈꾸며 옹골차게 거듭나고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

# 1990~2000년대

새 모습으로 탈바꿈한 부산의 아이콘 보수동 책방골목과 국제시장

부평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을 팔았다고 해서 ‘깡통시장’이라 불렸다. 지금도 군데군데 통조림 가게가 남아있다.

지난 8일 신학기 대목을 맞은 보수동 책방골목은 평일임에도 붐볐다. 아이 학습지를 사러 온 엄마, 유창한 한국어로 제주방언 사전을 찾는 미국 청년도 있었다. 보수동 대우서점 김종훈(61) 사장의 표정도 밝았다. “3~4년 전만 해도 많은 서점이 문을 닫았어요. 올해는 형편이 조금 나아졌어요.”

 보수동 책방골목은 올해로 생긴 지 60여 년째.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피란 온 부부가 보수동 사거리에서 미군부대에서 구한 헌 잡지와 만화, 헌책을 팔던 게 시초였다. 60~80년대 호황을 누리며 70개 이상으로 불어났던 책방골목 서점은 그러나 이제 40여 개로 반 토막이 났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등장한 홈쇼핑과 인터넷 서점의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했다.

 90년대 말부터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대대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헌책방 20여 개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새 책 서점이 들어섰다. 2004년 책방골목 축제를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보수동 책방골목 공동 온라인 쇼핑몰(bosubookstreet.com)을 열었다. . 최근 3~4년 사이에는 책방골목 곳곳에 분위기 좋은 카페도 늘었다. 90년대 후반 이후 몰아친 위기를 극복하며 보수동 책방골목은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2000년대 이후 해운대 상권에 밀려 주춤했던 국제시장도 최근 다시 활력을 얻는 분위기다. 광복 이후 들어선 국제시장은 자갈치시장·부평시장(깡통시장)과 함께 대표적인 피란민의 터전이었다. 피란민이 생필품을 물물교환한 곳도 국제시장이었다. 당시 구호식품 꿀꿀이죽(잡탕죽)과 강냉이죽(옥수수죽)은 지금도 즉석 죽 등의 이름으로 맥을 잇고 있었다.

● 마을 정보 보수동 책방골목은 중구 보수동 1가 에 있다. bosubook.com. 일요일 휴무. 국제시장은 첫째·셋째 일요일 쉬는 곳이 많음. 책방골목 길 건너편. 중구 신창동 4가. 상인회 051-345-7389.

# 2010~2012년

젊은 예술가 포진한 ‘부산판 대학로’ 중앙동 40계단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살인 무대로 등장해 널리 알려진 중앙동 40계단.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40계단 바로 아래까지가 바다였다. 피란민은 이곳에서 가족과 연인을 떠나보내며 재회를 약속했다.

 이 일대는 영선산을 깎아 만들었다. 그래서 건물 대부분이 내부 계단을 통해 아래위 도로를 연결하도록 돼 있었다. 이를테면 아래 도로에서 건물 1층에 들어가 4층으로 나오면 위쪽 도로로 나갈 수 있다. 40계단문화관(40stair.bsjunggu.go.kr)에서 당시 피란민의 생활상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요즘 40계단 일대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문화공간이 부쩍 늘었다. 40계단 중턱에 문을 연 은공예방 ‘은여우’에서는 은세공품을 배우고 구매할 수 있다. 인문학센터 ‘백련어’에서는 카페 메뉴를 즐기며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영화 갤러리 ‘보기드문’에서는 2000점 이상의 영상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새로 생긴 문화공간이 스무 곳에 달한다. 부산 중구청이 2010년부터 진행해 온 ‘또따또가’사업 덕분이다.

 ‘따로 또 같이’라는 뜻의 또따또가는 미술·공예·밴드·영화·연극·문화잡지·문학 등 다방면의 예술인을 후원하는 사업이다. 신진 예술가에게 40계단 일대 빈 사무실을 3년간 공짜로 빌려주고, 작가는 일반인에게 모든 전공 분야를 교육한다. ‘백련어’를 운영하는 이수우(53) 시인은 “연안부두와 가까운 가장 부산다운 공간에서 부산 예술의 현재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따또가 홈페이지(www.tttg.kr)나 은여우에서 참여 작가 작품과 홍보물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 정보 40계단은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 길 건너편 우측 국민은행 골목에 있다. 또따또가 공방과 갤러리는 40계단 인근에 분포해 있다. 또따또가 운영지원센터 051-469-1978.

돼지국밥·밀면·완당 … 싼 재료로 만든 ‘대타’ 대박

전쟁에 떠밀려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은 고향의 맛으로 주린 마음을 달랬다. 부산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대신 넣느라 모양새는 고향 것과 조금 달라졌다.

 대표적인 음식이 돼지국밥이다. 원조는 설렁탕이다. 하지만 전쟁통엔 소가 귀했다. 소 대신 돼지로 육수를 냈다. 거기에 돼지수육·내장·순대를 넉넉히 담았다. 부산에서는 정구지(부추)와 새우젓을 더해 짭짤하게 간을 했다. 1969년부터 국제시장에서 국밥을 말았다는 ‘신창국밥’ 서혜자(73) 사장은 “그때는 싼 맛에 돼지국밥을 많이 찾았다”고 회상했다. 분홍빛이 감도는 야들야들한 돼지수육과 매일 아침 손수 만드는 찹쌀 순대가 이 집 돼지국밥의 비결이다. 신창국밥 본점은 현재 국제시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부평시장 인근으로 이전했다. 돼지국밥(사진)6000원, 수육 백반 8000원. 051-244-1112.

 밀면은 냉면과 친척 사이다.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는 메밀을 구할 수 없었다. 냉면 맛을 잊지 못한 이북 피란민은 메밀 대신 밀가루로 면을 뽑고 육수를 부어 냉면 비슷하게 먹었다. 그게 밀면의 유래다. 국제시장에서 자갈치시장 방면으로 10분 걸으면 30년 전통의 ‘이상재 본가밀면’ 남포점이 나온다. 육수 맛이 깔끔하다. 물밀면 3500원, 회비빔면 4500원. 051-231-2202.

 완당은 사연이 다르다. 원래 중국 완탕을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한 것으로, 한국전쟁 전에도 있었다. 멸치육수에 마늘과 생강을 우려 알사탕만 한 완당 만두를 넣고 끓여 만들었다. “만두보다 속재료가 덜 들어가 값이 싸 피란민이 즐겨 찾았다”고 김인남(58) 부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귀띔했다. 추천 맛집은 18번 완당집. 국제시장과 남포동 대영시네마 사이 골목에 있다. 완당·완당우동 5500원. 051-245-0018.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