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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17) - 자니 벤치

중앙일보

입력

포수라는 포지션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포수는 팀의 안방에서 투수와 호흡을 맞추고, 주자를 견제하고, 때로는 다른 야수들(특히 내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지정하는 일까지 해야 한다.

더구나 주자를 아웃시키는 능력은 항상 팀의 승패와 직결되며, 홈 플레이트 주위로 떠오른 파울 타구 처리 처리에 실패하여 타자를 살려 주는 바람에 팀이 결정타를 맞기라도 하면 당장 포수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포수는 투수를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포지션으로 불리며, 동시에 가장 힘든 포지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포지션을 가장 훌륭하게 소화한 인물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혹자는 뉴욕 양키스의 전성 시대를 이끈 빌 디키와 요기 베라를 거론할 수도 있고, 니그로 리그의 신화적인 영웅 자시 깁슨을 꼽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미키 카크린이나 개비 하트닛,어니 람바디 등도 충분히 거론될 만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자니 벤치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는 사람들이 많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는 10년 연속 골든 글러브로 상징되는 당대 최고의 수비력을 보유했으며, 동시에 포수로서는 드물게 홈런왕에 2번, 타점왕에 3번이나 등극한 강타자였다.

내셔널 리그 역사상 최강의 타력을 보유한 팀으로 알려진 1970년대 중반의 '빅 레드 머신'에서 벤치는 핵심 멤버 중 하나였으며, 그가 팀 내에서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 즉, 그가 당시의 레즈에서 피트 로즈나 조 모건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레즈의 감독이었던 스파키 앤더슨은 "단정짓건대, 벤치가 최고의 포수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물론 역대 최고의 포수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벤치가 역대 포수들 중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들 중 기량상 으뜸으로 불릴 인물들을 꼽을 때에 벤치가 포함되어야 함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벤치는 한때 선수 생활을 했던 아버지 테드 벤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야구를 접했다. 그에게 포수를 맡을 것을 권유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이다. 10대 시절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1965년에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레즈에 지명되어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는 1966년에는 캐롤라이나 리그에서 시즌 중반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22홈런을 날려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다. 이듬해 그는 마이너 리그에서 4개월을 보낸 뒤, 빅 리그로 승격되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다.

1967년을 주로 후보 포수로 보낸 뒤, 1968년 벤치는 주전으로 도약하여 154경기를 소화하였다. 그는 이 해에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신인왕과 골든 글러브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포수 부문 골든 글러버'라는 호칭은 이후 1977년까지 그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 해의 성적은 그가 앞으로 펼칠 대활약의 예고에 불과했다. 1969년에 본격적으로 슬러거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1970년 생애 최고의 해를 보냈다. 그의 45홈런과 148타점은 리그 최고 기록이었으며, 그는 23세의 나이에 MVP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희대의 실수로 불린 프랭크 로빈슨의 트레이드를 단행한 후 침체기를 걷고 있던 레즈는, 이 해에 벤치의 활약에 힘입어 9년만에 다시 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이 때부터 기자들은 막강 타선의 레즈를 '빅 레드 머신'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레즈는 월드 시리즈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5경기만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듬해 벤치는 슬럼프를 보였고, 이는 팀 성적과 직결되었다. 결국 1971년 페넌트 레이스가 끝난 뒤 레즈가 받아 쥔 성적표는, 지구 챔피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한참 뒤진 4위였다.

쓴 맛을 본 벤치는, 1972년 시즌 초반에도 그리 나아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즌이 중반에 접어들자 그는 2년 전을 연상시키는 맹타를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결국 이 해에 40홈런, 125타점으로 이 두 부문 수위를 되찾았으며, 또다시 MVP가 되었다.

벤치의 활약에 힘입은 레즈는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1970년에 이어 또다시 동부 지구 챔피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누르고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이처럼 레즈가 강팀의 면모를 되찾은 것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데려온 모건의 활약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벤치의 활약이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는 사실이기도 했다.

레즈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대결한 월드 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리그 타점 랭킹 3위에 오른 벤치와 타격왕·MVP를 차지한 로즈를 앞세워 다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올랐으나 뉴욕 메츠에 밀려 탈락했다.

1974년 129타점을 올린 벤치는 생애 3번째 타점왕을 차지하였으며,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마이크 슈미트를 제외한 내셔널 리그의 어느 타자보다도 많은 33홈런을 날렸다. 그러나 이 해에 서부 지구의 패권은, 특급 구원 투수 마이크 마셜을 앞세운 LA 다저스에 돌아갔다.

1975년, 레즈는 팀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이 해에 레즈는 108승을 올려 다저스를 20게임 차로 누르고 서부 지구의 왕좌를 탈환했으며,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파이어리츠를 3연승으로 누르고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그리고 보스턴 레드 삭스와 대접전을 벌인 끝에, 4승 3패로 시리즈를 마감하여 35년만에 패권을 거머쥐었다.

우승의 원동력은 막강한 타선과 수비력이었다. 벤치와 1루수 토니 페레스는 타점 랭킹에서 각각 2·3위에 올랐으며, 모건은 출루율 수위와 MVP를 차지하였다. 또한 벤치와 모건, 중견수 세사르 헤로니모와 유격수 데이브 콘셉시온 등 4명이 골든 글러버가 되었다.

1976년에 벤치는 타석에서는 전년도 포스트 시즌의 부진을 계속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팀의 안방을 굳건히 지켰고, 레즈는 다시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뉴욕 양키스와 대결한 월드 시리즈에서, 벤치는 15타수 8안타와 6타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고 단 한 번도 도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팀의 2연패의 일등 공신임을 인정받아 월드 시리즈 MVP가 되었다.

1977년에는 벤치의 타력은 다시 살아났으나, 레즈는 다저스에 다시 지구 우승을 양보했다. 그리고 이후 '빅 레드 머신'은 해체 과정을 겪게 되었고 로즈와 페레스, 모건 등 간판 스타들이 대부분 팀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레즈는 벤치만큼은 내보낼 수 없었다.

벤치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계속 20개 이상의 홈런을 날려 강타자의 면모를 지켰으나, 쇠퇴 기미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78년부터는 골든 글러브도 밥 분과 게리 카터 등에게 양보하게 되었고, 좋지 않은 무릎과 체력적인 한계 때문에 팀에 다른 포지션을 맡겨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벤치는 1981년에느 1루수로 주로 활약하였고, 이듬해부터는 주로 3루를 맡았다. 그는 1983년에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하고 12홈런과 54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한 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1989년에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은퇴 후 여러 분야의 자선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고 CBS의 캐스터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자니 리 벤치(Johnny Lee Bench )

- 1947년 12월 7일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 시티 출생
- 우투우타
- 1967 ~ 1983년 신시내티 레즈 포수
- 통산 성적 : 타율 2할6푼7리 2048안타 389홈런 1376타점
- 명예의 전당 헌액 : 1989년(By BBWAA 득표율 9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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