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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가 필요한 서양, 상대방 강조하는 동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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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25면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교포가 한국말을 하면, 뭔가 어색하다. 모든 문장에 반드시 주어를 쓰기 때문이다. 서양의 모든 언어는 주어가 분명하다. 모든 문장에는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어에는 주어가 대부분 생략된다. 이야기하는 맥락으로 행동의 주체를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오해가 많다.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 맥락의 주체가 누군지, 도대체 어떤 느낌을 갖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맥락적 사고’라고 한다. 순수 한국어로는 ‘눈치’라고 한다. 대개 권력 관계에서 밑에 있는 사람의 눈치가 빠르다. 여자들이 눈치가 빠른 이유도 권력 관계에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눈치는 특히 여자에게만 강하게 나타나는 심리적 특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⑭심리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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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눈치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집안의 권력 관계에서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도 회사에 나가면 윗사람 눈치를 기가 막히게 본다. 그러나 집에서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아무 눈치 없이 그저 퍼져 지내는 것이다. 물론 요즘 사정은 많이 바뀌었다. 안팎으로 눈치를 봐야 한다. 24시간 내내 ‘맥락적 사고’를 가동하며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주 작은 맥락적 단서만 보여도(예를 들어 아내의 목소리 톤) 수시로 가슴이 벌떡벌떡한다. 그래서 40~50대 한국남자들의 돌연사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갑자기 너무 많이 비약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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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를 명확히 하지 않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영어를 배울 때 가장 많이 틀리는 부분이 있다. ‘Yes’와 ‘No’의 활용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리따운 서양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치자. 어느 날, 그 서양 여자가 슬픈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Don’t you love me?(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당연히 그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아주 강하게 부정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No! I love you.(아니야! 난 널 사랑해.)”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면 바로 망한다. 나는 지금 아주 헷갈리고 황당한 대답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영어로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고 대답하려면, 그녀의 질문이 긍정문이든 부정문이든 상관없이 “Yes! I love you”라고 대답해야 한다(이 설명을 다하고 나니, 더 헷갈린다. 아무튼 Yes·No의 활용은 토종 한국인이라면 영원히 마스터할 수 없는 문법인 듯하다).

서양인들은 질문이 부정문이든 긍정문이든 상관없이 모든 대답의 기준이 ‘주체’의 생각이다. 주체가 긍정이면 ‘Yes’고, 주체가 부정이면 ‘No’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서는 아니다. 상대방이 부정문으로 물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관점에 맞춰 매번 대답이 달라져야 한다. 사물을 보는 기준이 주체인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체의 구성방식은 문화마다 다르다. 특히 동서양의 회화에 사용된 원근법의 전통에서 아주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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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인식론 출발은 주체·객체의 구분
그림을 보는 시선이 하나이어야만 하는 서양의 선원근법은 근대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소실점이 하나이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인다. 모든 현대식 교육은 이 원근법에 맞춰 이뤄졌기 때문이다. 3차원을 2차원으로 축약하면 소실점은 하나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3차원을 2차원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지난번에 소개한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의 경우도 특이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역시 아주 흥미롭다. <그림 1>

추사의 세한도가 1844년에 그려졌다. 당시라면 중국을 통해 서양 그림이 많이 소개됐을 것이고, 학자라면 서양의 원근법에 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추사 역시 세한도에서 서양의 선원근법을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다. 오두막의 지붕 모습을 보면 소실점의 방향을 그림의 오른쪽 위쪽에 놓고 그린 듯하다. 이전의 한국화에서 나타나는 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세한도에 나타난 원근법은 그리 완벽하지는 않다. 특히 오두막의 둥근 문을 잘 들여다보면 아주 특이한 그림 구성이 눈에 보인다. 이 둥근 문의 두께를 표현하는 방식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오두막 지붕의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의 소실점을 향하고 있다. 왼쪽 아래를 향하게 돼 있다는 이야기다.

세한도 못지않게 흥미로운 또 다른 원근법이 있다. ‘역원근법(逆遠近法)’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선원근법은 가까운 물체는 크게,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그린다. 그러나 역원근법은 말 그대로 정반대다. <그림 2>의 경우다. 우리말로는 ‘책거리 그림’이라고 하는 ‘책가도(冊架圖)’다. 책을 비롯한 선비들의 문방구류를 그린 것이다. 서양식 원근법에 익숙한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불편하다. 앞쪽이 작고, 뒤쪽이 크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표현방식이 그리 어색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서구식 선원근법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면, 지금 우리가 이 책가도를 볼 때의 불편함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서양의 선원근법과 우리의 책가도에 나타난 역원근법의 차이는 단순한 회화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인식론의 차이다. 서구의 인식론은 ‘주체(subjective)’와 ‘객체(objective)’의 명확한 구분에서 출발한다. 대상을 ‘본다’는 행위의 주체가 전제가 돼야 인식론이 성립한다. 각 주체의 행위가 다르기 때문에 주체의 관점을 소실점으로 통일해 대상의 모습이 주체에 따라 더 이상 바뀌지 않는 상태로 만든다. 이를 ‘객관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객체(object)’와 ‘객관적(objective)’의 어원이 같은 것이다.

동양의 경우 이 주체와 객체의 개념이 그리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제3의 관점, 혹은 상대방의 관점이 중요하다. 앞서 설명한 ‘Yes·No’의 ‘화용론(pragmatics)’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시선, 혹은 제3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동양회화의 관점은 제3의 초월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 많은 경우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감도(鳥瞰圖)의 형태를 취한다. 조감도는 한자의 뜻 그대로 ‘새가 내려다보는’ 관점을 이야기한다. 일본의 경우 선원근법이 들어오기 전의 회화를 살펴보면 아주 특이한 방식의 화면 구성방식이 눈에 띈다.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에마키모노(繪卷物), 혹은 에마키(繪卷)라는 두루마기 형태의 그림 이야기가 있다. 특히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源氏物語繪卷)’가 유명하다. <그림 3>은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의 일부다. 이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오른쪽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 일본에서는 ‘후키누키야다이(吹拔屋臺:하늘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다보는 투시법)’라고 한다. 천장과 벽, 그 이외의 물건들을 과감하게 치워 버리고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야기와 이야기의 사이는 구름으로 경계를 짓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는 요즘 아파트 광고에서 유행하는 투시도와 사뭇 닮아 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을 정확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 그린다는 이야기다(이런 일본 회화의 전통을 잘 살펴보면 오늘날 일본에서 만화가 그토록 강력한 문화매체가 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나 책가도, 또는 일본 전통회화의 다양한 묘사방식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3차원을 2차원으로 편집하는 방법은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회화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다. 동양과는 달리 르네상스 선원근법의 확립 이후 서구에서 구성된 모더니티의 핵심은 바로 ‘관점의 통일’에 대한 강박이다. 이는 객관성, 합리성, 표준, 통일성의 철학으로 전개해 나간 근대 서구 사상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프로이트 심리학, 비과학적이라고 배제
르네상스 선원근법이 성립된 이후로 시작된 ‘통일된 주체’에 대한 강박은 근대 ‘심리학’으로 완성된다. 심리학이야말로 모더니티의 총화다. ‘심리’의 주체를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 교과서에서는 심리학의 기원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빌헬름 분트가 1879년에 세운 심리학 실험실로 설명한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심리학’ 하면 바로 프로이트를 떠올린다. 심리학과에 지원하는 학생의 대부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때문에 심리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각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들은 이러한 신입생들의 환상을 깨는 것을 심리학과 오리엔테이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오늘날 한국대학에서 프로이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곳은 없다. 독일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이들이 한국대학의 심리학과에 교수로 취직한 예는 없다. 일부 대학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고 자처하나 어떤 방식으로 공부했는가는 나로서는 알 바 없다.

심리학과 전혀 상관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구한 이들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라캉 등의 이론을 빙자해 프로이트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프로이트는 문학가로서의 프로이트일 뿐이다. (실제 프로이트는 아주 훌륭한 소설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고, 유대교는 원래 이집트의 종교였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또한 토템과 터부의 기원에 관한 프로이트의 문학적 상상력은 압권이다. 독일어 원본을 읽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읽기도 소설처럼 편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과학적 심리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된다. 이는 오로지 미국 심리학의 ‘악영향’이다. 우리나라 심리학과 교수들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공부했다. 나 역시 독일에서 공부한 탓에 한국에서 심리학과 교수가 못 됐다(내 친구들은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이고, 내 모난 성격이 더 큰 문제였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심리학은 빌헬름 분트를 ‘심리학의 아버지’로 떠받들지만 정작 분트 자신은 심리학자로 불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는 철학과 교수로 평생을 보냈다. 대학에 심리학과를 새로 개설하려는 시도에도 강력 반대했다. 분트는 원래 의학과 생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관심은 종교·문화·철학과 관련된 주제에 있었다.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생리학 관련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분트의 꿈은 폼 나는 철학과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에서 초빙을 받는다. 그러나 철학과 교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관념론자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방법론이 있어야 했다. 분트는 그 방법론을 생리학 실험방법론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분트의 실험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적 주체를 연구하는 모더니티의 총아 ‘심리학’의 시작이다(근대심리학의 허와 실은 다음 호에 계속된다. 심리학의 전성시대로 여겨지는 요즘에 꼭 읽어야 할 아주 특별한 내용이 될 것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 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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