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야누스 두 얼굴’ 그리스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2면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

그리스 국채가 사실상 디폴트 등급으로 강등됐다. 채권자에 대한 그리스의 약속 위반은 1822년 독립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나왔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그리스는 기원전 146년 로마 속주로 편입된 이래 2000여 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지 4년 만에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빌린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독립 후 첫 국가부도를 맞게 된다. 이때를 포함해 대공황 여파로 1932년 외채 지불유예를 선언하기까지 총 다섯 번의 디폴트를 반복했다. 이번 그리스의 국채탕감은 독립 후 190년 동안 여섯 번째 채무불이행이다. 차입과 부도가 반복되는 ‘약속 위반의 역사’를 걸어온 셈이다.

 그리스와 함께 서양 문명의 양대 뿌리인 로마로 시선을 돌려보자. 브리태니커 편집장이었던 찰스 밴 도렌은 ‘지식의 역사’에서 로마인은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인은 가지지 못했던 중요한 차이를 ‘실용성과 법률에 대한 존경심’으로 설명한다. 각각의 도시국가마다 규범이 있고 국가 전체보다는 개인의 철학을 중요시했던 그리스와 달리 로마인이 중요하게 여긴 가치는 공통된 법률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차이를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으로 압축했다. 2000여 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와 달리 로마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지중해의 패권국가로 자리 잡았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2012년 현재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기는 그리스와 마찬가지지만 아직까지 이탈리아는 G7 국가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법률에 의해 상환해야만 하는 국가 채무에 대한 시각차 때문일까. 재정위기에 직면한 이후 양국의 대응 방식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는 민간 채권단과의 협상을 통해 50% 넘게 부채를 탕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허리띠 졸라매기 정책은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국채금리가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고 있는 7%대에 진입한 작년 11월, 국가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정치인이 아닌 전문 경제관료 출신의 몬티를 총리로 내세웠다. 몬티 총리는 본인이 재무장관을 겸임하며 전문가 중심의 실용적 내각을 구성한 후 정부지출 삭감과 규제개혁 법안을 주도했다. 이탈리아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가 회복되며 한때 연 7.3%까지 올랐던 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4% 후반까지 하락했다.

 물론 유럽 재정위기의 근본적인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국채금리가 4%대로 하락했다고 해서 이탈리아의 재정위기가 해결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긴축의 고통은 길고도 깊게 이어질 것이다. 위기극복을 위해 뜻을 모았던 정치인이 다시 정파적 이해관계에 휩쓸리게 되면 이탈리아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로마인의 장점이었던 실용성과 법률에 대한 존중을 발휘하여 방만한 부채를 줄이고 긴축의 고통을 감내해가는 모습을 유지한다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로마 신이 그리스 신과 대응될 정도로 양 국가 간에는 유사점도 많다. 그러나 로마의 ‘야누스’에 대응하는 그리스 신은 없다. 앞뒤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은 보통 ‘위선적인’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앞 얼굴은 미래를 내다보고 뒤 얼굴은 과거를 돌아본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야누스의 두 얼굴과도 같은 혜안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리스는 역사상 최초의 디폴트 국가라는 불명예도 안고 있다. 기원전 4세기, 풍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던 델로스 신전으로부터 그리스의 13개 도시국가들이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사례가 그것이다. 당시 델로스 신전이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 회수하지 못한 금액은 원금의 80%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 그리스 국채에 대한 원금 탕감 협상에서 민간채권단은 델로스 신전, 그리스 정부는 13개 도시국가로 역할을 바꿔 역사가 반복된 셈이다. 그리스가 자신들의 디폴트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었다면 반복되는 부도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과거를 돌아본다고는 한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되짚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라고 갈파했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직시할 수 있었다고 하는 카이사르의 용기는 과연 우리에게서 9000㎞ 떨어져 있는 그리스에만 필요한 것일까.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