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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54) 미야자와를 바람맞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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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2000년 7월 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이헌재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 이용득 금융산업노조위원장(오른쪽부터)이 노·정 협상을 열기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협상에 참석하느라 이헌재 장관은 한?일 통화 스와프 협정을 날려버린다. 이튿날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대장상을 도쿄에서 만나 협정을 체결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게 됐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5년 전 별세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일본 대장상. 참의원 2선, 중의원 8선에 관방장관·외상·통산상을 거쳐 총리를 역임한 정치 거물이었다. 나는 그와 2000년 7월 8일로 잡았던 양국 재무장관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적이 있다. 그것도 회담 하루 전에 말이다. 회담은 8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재무장관회의에 맞춰 계획됐다. 우리는 양국의 통화 스와프 확대를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하려 했다. 5월 아세안+3 재무장관회의에서 체결한 통화교환협정 ‘치앙마이 이니셔티브’에 바탕을 둔 협정이다.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이를 갑자기 취소한 건 금융노조 파업 때문이었다.

 “중요한 회의입니다. 5월에 잡은 약속입니다. 꼭 가야 합니다.”

 전화기 너머 한광옥 비서실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안 됩니다. 대통령 명령입니다. 차관을 대신 보내세요.”

 “금융노조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압니다. 월요일 출정식까지만 할 겁니다. 절대 파업 안 합니다. 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이 잘 알아서 할 겁니다.”

 “더 이상 얘기 마세요. 장관께서 직접 막으라는 대통령 지시입니다. 출국 못 하십니다.”

 국무위원은 대통령 결재 없인 해외를 못 나간다.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일본에 양해를 구했다. “엄낙용 차관을 보낼 테니 구로다 차관과 협정을 체결해달라.” 그쪽에선 짧은 답이 왔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미야자와가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했다. 한·일 통화 스와프 협정은 그렇게 물 건너갔다.

 이 사달이 난 건 이용득 당시 금융노조위원장 때문이었다. 금융노조는 “11일 총파업을 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었다. 1998년 9월, 당시 전국금융노조연맹의 총파업이 한 차례 무산된 터. 이번엔 단단히 벼른 모양이었다. 이 위원장은 7일로 예정돼 있던 정부와의 협상을 하루 앞두고 “재경부 장관이 안 나오면 협상 안 하겠다”고 나왔다.

 DJ는 조바심을 냈다. 4월 총선에서 대패한 직후다. 6·15 정상회담은 생각보다 여론에 도움이 안 됐다. 이 상황에서 파업이 일어날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용득의 무리한 주장을 들어주라고 주문한 것이다.

 7일 오후, 마지못해 나간 명동 은행회관 회의실. 분위기는 살벌했다. 고성이 오갔다. 이용득은 거친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 투쟁 의지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를 회의실 옆 작은 방으로 불러냈다. 우리는 서로 낯설지 않다. 98년 9월 명동성당에서 프로끼리 이심전심을 나눈 사이다. 단둘이 나눈 대화는 선문답 같았다. 각자 자기 입장만 확인했다.

 “월요일 전진대회는 할 겁니다.”

 “그건 알아서 하시오. 알다시피 정부도 구조조정은 계속 해야 하는 거니까. 대신 출정식까지만입니다. 더 나가면 공권력 발동합니다.”

 “우리도 뭔가 선언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건 이용근 위원장하고 잘 상의하세요.”

 협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출정식만 하고 파업은 없다. 대신 우리도 그쪽에 명분을 줘야 한다. 이용근 금감위원장과 이종구 재경부 국장은 노조 측과 이틀간 협상문을 만드느라 실랑이를 벌인다. 험한 말들이 오갔다 한다. 핵심은 협상문의 한 줄이었다. ‘구조조정을 할 때 인위적인 인력·조직 감축은 지양한다.’ 양측 모두 명분을 얻기 위해 다듬은 문장이다. 노조는 “구조조정을 지양한다고 정부가 약속했다”로, 정부 측은 “불가피한 구조조정은 할 수 있다”로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금융노조는 7월 10일 오후 연세대 운동장에서 대대적인 출정식을 연 뒤 파업 없이 해산했다.

 물 건너간 한·일 통화 스와프 협정. 나는 이걸 DJ 정부 마지막 활동으로 생각하고 준비했다. 재경부 장관이 된 뒤 나는 마음껏 일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99년 5월 개각 이후 줄곧 그랬다. 1기 경제팀은 부처 간 협의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규성 재경부 장관, 강봉균 경제수석과는 수시로 만나고 상의했다. 정권 초기 구조조정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던 건 그래서였다. 99년 개각 이후 청와대와는 대화가 끊겼다. 부처 간 협의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 초 재경부 장관이 된 뒤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해 3월 청와대는 아예 사회복지정책 관계장관회의란 걸 만든다. 재경부 장관을 빼고 환경·노동·복지부 등의 장관들이 모이는 회의였다. 의약분업이니 국민연금 관련 굵직한 정책 논의가 거기서 이뤄졌다. 나라 살림을 총괄하는 재경부를 배제한 채 말이다. 겨우 엄낙용 차관을 들여보냈다. 하지만 장관들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의견을 펼쳤으랴.

 사회장관회의는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 모양이다. 의약분업 문제가 빨리 조율되지 않자 DJ는 한광옥 실장을 채근했다. 급기야 5월 말 한 실장 주재의 관계 장관 회의가 열렸다. 내게도 다급히 참석 요청이 왔다. 나는 이때 처음 의약분업 관련 논의에 참석했다. 비서실장이 주재한 장관 회의. “상식 밖의 풍경” “내관(內官) 정치” 라며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의도적인 배제와 파행적인 논의. 무성한 잡음 속에서 의약분업은 7월 실시된다. 사의를 표명한 내가 개각을 기다리고 있던 때다. 그러다 개각 직전 급성 맹장염에 걸렸고,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의사 파업으로 수술실에 겨우 들어갔다. 병상에서 개각 소식을 들었고, 침상에서 이임사를 구술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은 이렇게 맞물려 돌아간다. 털어놓고 나니 그 길었던 2년 반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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