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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조셴진에서 일본 최고의 지휘자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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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모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그의 공연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이 말이 크게 과장이 아닌 듯하다. 적어도 그의 연주회는 3년에 걸쳐 매주 방송되었다. 그의 이름이나 얼굴을 모를 수는 있어도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음악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거란 얘기다."

그는 한국인이다. 아니 정확히는 남북 분단 이전의 조선을 국적으로 갖고 있는 이른바 무국적 조셴진, 김홍재다. 위의 이야기는 일본 현지의 이야기고, 한국에는 그에 대해 알려진 게 정말 없다. 20일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
전야제 축하공연을 지휘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인터뷰한 중앙일보 스포츠문화 에디터 이헌익 님은 "한국에서는 그의 존재가 무명에 가깝다. 그의 내한은 금기였고, 그에 관한 소식조차 일종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적인데다 1990년 평양범민족대회에서 평양교향악단을 지휘한 기피인물이었다"고 했다.(중앙일보 10월 16일치 15면 참조)

일본의 세계적 대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를 아는 우리는 그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지휘자가 바로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눈 김홍재 님이었던 것을 몰랐다. 또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웃집 토토로〉와 그 감독 미아자키 하야오를 아는 우리는 〈이웃집 토토로〉의 음악을 비롯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음악은 반드시 한민족 김홍재 님이 담당한다는 것을 몰랐다.

김홍재님의 방한에 발맞춰 그의 음악과 삶을 글로 풀어낸〈김홍재, 나는 운명을 지휘한다〉(김홍재 박성미 함께 지음, 김영사 펴냄)
가 나왔다. 그가 지휘한 음악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CD도 포함돼 있다. 일본 땅에서 조선적을 가지는 바람에 겪어야만 했던 고단한 운명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일본 최고의 지휘자 자리에 오른 그의 이야기는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감명을 줄 만하다. 단순한 성공 스토리라기보다는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낸 옹골찬 투쟁 과정이기에 감동은 배가된다.

그가 일본 최고의 지휘자라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스물 셋의 나이로 일본 최고 영예의 음악상인 사이또 히데오 상을 받으면서부터 일본 열도에 화제를 몰고 왔다. 1979년의 일이었다. 당시 열린 도쿄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그는 2위에 입상했다. 1등은 일본인 국적의 지휘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대회 자체 규약에 매인 것. 그러나 2위 수상자인 그는 이때 처음 수상자를 내게 되는 특별상 '사이또 히데오'상을 차지했다.

일본 음악계의 대 사건이었다. 일본 최고의 영예가 될 사이또 히데오 상의 첫번째 수상자가 일본인이 아닌, 그것도 조선 국적의 '조셴진'에게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컸다. 김홍재 님의 역량이 과연 이같은 일본 음악계의 고정 관습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음을 증거하는 뉴스일 게다. 김홍재 님 데뷔 직후의 일이다.

일본 음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그 뒤 도쿄방송(TBS)
의 음악 프로그램 '오케스트라가 찾아왔다'의 전속 지휘자로 선정돼 스무 개의 일본 주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이어 니뽄방송(NTV)
의 '나의 음악회'를 맡아 일본 전역에 그의 음악을 울리게 했다.

'대지에 뿌리내린 대륙 민족다운 대담성과 그 대지에 대한 깊은 사랑'을 지휘봉 끝에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81년부터 도쿄 시티 필의 전임 지휘자가 된다. 조선인이 일본 오케스트라의 전임지휘자가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 이후 85년에는 나고야 필하모니, 87년에는 교토시 교향악단의 전임지휘자로 임명되는 등, 지휘자로서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다지게 된다.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뒤로는 단 하루도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숨 고를 시간조차 없이 달리기만 했다'는 그는 데뷔 10년 기념 연주회를 마친 34살 때 어렵게 독일로 유학을 떠나고 전부터 흠모해왔던 베를린의 작곡가 윤이상 님과의 만남을 이룬다. 김홍재 님은 자신에게 지휘자로서 음악 이전의 철학과 사상을 가슴 깊이 심어준 사람이 곧 윤이상 님이라고 회고한다.

상처입은 베를린의 용, 윤이상 님으로부터 음악과 삶의 깊이를 더하게 된 그는 남북한 합동 음악제 등 통일을 기원하는 음악에 열정을 쏟아넣는다. 이미 평양에서 연주회를 가졌던 그는 이번에는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전야제 축하공연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국적 없는 조선인이 일본 최고의 지휘자가 되고, 자신의 조국인 남과 북을 하나로 잇는 평화의 음악 사절로 우뚝 서게 되는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이 책에서 우리는 음악의 감동과 함께 분단 한국의 현실을 뼈아프게 부등켜 안고 살아온 김홍재 님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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