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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IMF 3년, 미완의 졸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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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이면 우리 나라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지 3년을 맞는다. 돌이켜보면 3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간 늘어난 주름살을 보면 30년은 산 것 같다.

지난 8월 말로 IMF관리체제는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고, IMF로부터 빌린 구제금융 중 나머지 60억 달러도 곧 전액 상환할 것이란 얘기가 들린다. 이제 우리는 지긋지긋한 IMF터널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일까.

IMF졸업이 ‘위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까. IMF졸업과 재입학을 반복한 멕시코의 사례도 아울러 살펴봤다.

IMF하면 금 모으기 운동부터 떠올리게 된다. 해외에서도 참여한 이 운동은 IMF체제 극복에 활력소가 됐다.

우리 나라가 외환유동성 부족으로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은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는 순채권국으로서 외환보유고는 9백25억 달러에 달하고 단기외채 수준 역시 국제기준에 비추어 안정수준(52.7%)
을 유지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8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로 6백35억6천만 달러의 단기채권을 막아내야만 했던 상황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하겠다.

기록적인 마이너스 성장률(98년, -5.7%)
과 한때 경제활동인구의 9% 가까이가 실업자였던 적(99년 2월)
도 있지만 현재는 경제성장률, 물가, 경상수지 등 주요 거시지표 역시 우리 경제가 대내외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국제 유가의 상승(두바이유 기준 배럴당 30달러 유지시)
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경제는 올해 경제성장률 8.3%, 물가상승률 2.6%, 경상수지 90억 달러 흑자 등의 좋은 성적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이런 상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치렀던 대가도 적지 않았다. 전체 금융기관의 약 22%에 달하는 4백72개를 정리했으며 1백10조원의 공적 및 공공자금을 금융권에 투입했다. 이러한 수치가 외환위기과정에서 국민들이 근로자, 투자자, 예금자로서 겪어야 했던 물리적·심리적 고통을 충분히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들은 산적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구조조정 부진은 ‘냉열탕’식 정책 탓

이들 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의 가속화다. 최근 들어 그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 구조조정의 진척도는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권은행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워크아웃 기업들의 수익성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고, 오히려 도덕적 해이 등의 문제만 심화되는 모습이다. 활황 증시를 통한 막대한 유상증자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부채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상당수 기업들이 증자로 조달한 자금을 부채축소나 다운사이징에 쓰지않고 경기상황을 오판하여 설비증설 등에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기업들의 수익성 없는 부문에 대한 과잉투자였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크게 우려되는 부분이다. 물론 일부 선도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지속해 탄탄한 수익성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보다는 전자의 행태를 보이는 기업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이며 이는 수익성이나 자금조달의 양극화로 연결되고 있다. 우선 수익성 면에서 올 상반기 사상 최고의 이익을 기록했다는 상장 제조업 회사들의 실적을 보면 상위 10개 기업이 전체 순익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자금조달의 양극화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채권시장의 경색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소수의 신용등급 A급 이상 회사채에는 금융기관들의 투자가 몰리고 금리도 9% 미만으로 낮게 형성되는 반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BBB급 이하 채권은 11%를 훨씬 상회하는 금리에도 불구하고 매매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일부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러한 기업 구조조정 부진의 원인으로 정부와 IMF의 ‘냉열탕식’ 거시경제 정책을 든다. 과도한 고금리에 이어 똑같이 과도한 저금리를 너무 오래 실시하다 보니 경기가 지나치게 급격한 회복세를 보이게 되고, 이에 따라 기업들은 외환위기 초기의 절박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며 오히려 사업은 확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기업 구조조정이 부진하다 보니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은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어 공적자금의 소요가 다시 늘게 됐다. 구조조정 부진에 실망한 외국인들이 주식시장을 이탈하면서 주가는 크게 떨어지고,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 길이 막힌 기업들의 자금압박과 부도가 이어져 금융권의 부실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뒤늦게나마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는 연말까지 상당수의 부실기업을 퇴출하고 4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 투입해 금융권의 부실을 해소하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부실기업 퇴출과 금융 구조조정의 완료가 그렇게 빠른 시일내에 완수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경기불안과 금융시장 및 기업자금경색 수준을 감안할 때 이 과정이 우리 경제에 큰 주름살을 주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될지 우려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의 가속화라는 큰 과제말고도 당국이 풀어야 될 난제는 많다. 내년 초에는 예금부분보장 제도, 제2단계 외환자유화 등 굵직굵직한 정책들이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제도실시에 따른 부동자금 이동으로 일부 금융기관이 처할 위기에 대비하고, 또한 제2단계 외환자유화에 따른 대규모 자본 유출입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외환위기 후 크게 늘어난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정부 계획대로 2003년까지 균형재정을 달성하고 또 구조조정과정에서 발행한 국가채무를 축소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재정긴축을 유지해야 한다. 외환위기 후 ‘투기등급’(B+,14등급, S&P 기준)
에서 ‘투자등급’(BBB, 9등급)
까지 올라선 국가신용등급이 과거 수준(AA-, 4등급)
까지 회복되는 문제도 여전히 장기과제로 남아 있다.

*** 장기적인 성장 엔진 만들어야

물론 외환위기라는 금융위기의 수습이 결코 우리 경제의 최종 과제일 수는 없다. 변화하는 세계경제 환경 속에서 대외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성장 능력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또 다시 경제 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실물부문 뿐 아니라 금융부문의 대외충격에 대한 노출도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경제의 수출입의존도는 90년 62% 수준에서 99년 현재 81% 수준까지 올라갔으며, 수출의 소수품목 집중현상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우리 나라 수출에서 5대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년 21%에서 2000년에는 34.2%까지 올라섰는데 이는 미국(21%, 98년)
·일본(28%)
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세계화 추세속에서 대외충격에 대한 노출도가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경제가 지속가능한 성장동인만 확보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주요 산업의 기술력은 아직 선진국의 60∼70% 수준에 불과하며 기술격차도 3∼7년 뒤떨어진다(우리 나라의 주요 과학기술수준 조사, 1999년 9월)
. 또 이를 반증하듯 90년대에 경쟁국의 수출단가가 개선되는 중에도 우리 나라의 수출단가는 11% 가까이 하락했으며, 올해 들어서도 이 추세는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나라의 임금상승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주요국에 비해 2∼5배나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금융산업의 경쟁력 확보도 작지 않은 문제이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BIS비율은 다소 개선되었으나 무수익여신비율은 아직 선진국의 2∼7배 수준이다.

또 규모의 열세와 더불어 국내은행의 수익성은 미국·영국 은행들에 비해 아직 낮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국내 5대은행의 총자산규모는 주요국의 10∼15%에 불과하며, 자기자본수익률은 미국·영국 은행들의 28% 수준이다.

물론 희망의 싹도 보인다. 금융위기 수습과 구조조정 과정 속에서도 우리 나라의 정보통신 산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 경제기획청이 최근 발표한 ‘아시아 경제 2000’이란 백서에서 조사대상 12개국 중 한국은 향후 성장가능성을 보여 주는 ‘지식지표’에서 미국·일본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세계 4∼5위권을 자랑하는 휴대폰 보급률, 1천5백만을 넘어선 인터넷 사용자 수 등은 향후 지식기반 산업이 주도할 세계 경제에서 우리 나라의 앞날을 밝게 해주는 요인들이다. 향후의 난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하면서 경제의 고도화를 추진해 장기 성장동인이 확고해지도록 만든다면, 외환위기 같은 경제위기 경험은 단 한번으로 족한 것이 되리라고 본다.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해외경제실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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