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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 1000명 심판대 세운 ‘살아남은 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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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만화란 새 분야를 한국 최초로 개척한 문명비평가 이원복 교수에겐 ‘국민 만화가’란 별칭이 따른다. 그런데 이 교수는 2007년 2월 한 미국 유대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이 교수의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 제10권 ‘미국인편’에 나온 유대인과 관련한 세 컷의 만화 때문이다. 이 단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사이먼 비젠탈 센터’였다. 이 유대 기구는 세 장면의 만화가 유대인을 비하·왜곡해 반유대주의를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인권단체인 디펜스포럼 회장 수잰 숄티 여사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항의를 했다. 미 국무부도 이례적으로 이 만화를 반유대주의 사례로 보고했다. 미국 유대 사회의 ‘힘’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2007년 3월 15일 비젠탈 센터 간부 수명이 방한해 저자·출판사 측과 협의를 했다. 결국 이 교수의 해명과 함께 만화 재고분은 폐기 처분하고 개정판에서 문제된 만화 내용을 수정한다는 출판사 측 약속으로 사건은 수습됐다.

친척 100여 명 대부분 수용소서 사라져
사이먼 비젠탈 센터는 1977년 창립된 미국 유대 기구다. LA 본부를 위시해 뉴욕·마이애미·토론토·파리·부에노스아이레스 등지에도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이 기구의 주요 활동은 나치 전범 색출, 반유대주의 모니터링과 대응, 그리고 ‘쇼아’(히브리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며 보통 홀로코스트를 지칭)의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역사 부정주의 확산 방지 등이다. 기구 명칭은 평생을 나치 전범 추적에 바친 사이먼 비젠탈(사진)이란 인물에서 따왔다.

스지몬(사이먼) 비젠탈은 1908년 동유럽 최대 유대인 밀집지역이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갈리치아(현 우크라이나 영토) 태생의 유대인이다. 장성한 비젠탈은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리비우와 체코의 프라하 등지에서 건축 설계를 공부했다. 학업 후 리비우로 돌아와 설계사로 활동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소련군에 일시 점령됐고 비젠탈과 가족은 소련군의 박해를 받았다. 41년 독일군의 소련 침공과 함께 이번엔 이 지역이 나치군 점령하에 놓이게 됐다. 비젠탈과 그의 유대인 친척 100여 명 대부분은 동유럽 여러 개 도시에 분산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폴란드와 독일 유대인 수용소 여섯 곳을 전전하며 죽음을 기다리던 비젠탈은 45년 5월 나치 독일의 패망과 미군 진주로 해방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생환했다.

46년 비젠탈은 생업인 설계업을 버리고 자신과 같은 홀로코스트 생환자 20여 명과 함께 오스트리아 린츠와 빈에 ‘유대 문헌·자료센터’를 설립해 나치 잔당 색출사업을 벌였다. 특히 이름을 바꾸고 남미의 아르헨티나·칠레·브라질·파라과이 등지에 은신한 옛 나치군 장교 색출에 주력했다. 안네 프랑크를 체포했다는 카를 실버바우어, 독일·오스트리아 유대인 학살 책임자 프란츠 슈탄글, 그리고 유대 여성 학살을 전담한 나치 여군 장교 헤르민 브라운슈타이너 등을 찾아내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브라운슈타이너는 미국인 이름으로 뉴욕 퀸스에 숨어 지내다 잡혔다. 또 38~45년 라트비아 리가에서 유대인 3000명의 학살을 총지휘해 ‘리가의 백정’ 별명을 얻은 나치 비밀경찰 SS 간부 에두아르트 로시만의 인도를 위해 파라과이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로시만은 77년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사망했지만 비젠탈은 위장사망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비젠탈이 색출한 나치 전범 숫자만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

1977년 미국 유대 사회를 중심으로 비젠탈 센터가 설립된 뒤 이 기구는 몇 가지 획기적인 사업을 벌였다. 비젠탈 센터는 미국 내 다른 유대 기구와 합동으로 대의회 로비를 벌여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단지 내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건립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미국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참사를 추모하는 기념관을 꼭 미국 수도에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으나 미국 유대단체는 관철시켰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3년 기념관이 개관됐다.

97년 비젠탈 센터는 2차 대전 중 나치가 유대인 소유의 금을 금괴로 만들어 스위스 등 중립국을 통해 은닉·활용했다고 폭로했다. 스위스는 5억8000만 달러(약 6300억원) 상당(현 시세 75억 달러 이상 추정)의 나치 금괴를 인수해 3억 달러분 금괴는 스위스 중앙은행에 예치하고 나머지는 제3국 은행계좌로 돈 세탁해 독일 군 자금으로 충당케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나치에 협조한 다른 국가로 스웨덴·포르투갈·스페인·터키 등이 지목됐다. 또 일부 스위스 은행은 전쟁기간 중 휴면 상태였던 유대인 예금에 대해 예금주의 사망과 실종을 이유로 가족 등 연고자를 찾지 않아 예금의 착복 의혹을 일으켰다. 비젠탈 센터의 끈질긴 추적 결과에 따라 스위스는 98년 유대인 휴면 계좌분 43억 달러(약 4조8000억원)를 세계유대총회(WJC)를 통해 ‘쇼아’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97세로 사망…이스라엘에 묻혀
비젠탈은 2005년 9월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이스라엘 헤르즐리아에 묻혔다. 비젠탈은 자신의 활동은 “보복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정의 구현”이라고 말했다. 비젠탈 사후 그의 경력과 행적에 대해 일부 의문점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인류 최대의 재앙인 ‘쇼아’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선구자란 평가가 따른다.
칸트·괴테·실러·바흐·베토벤을 배출한 전통 문화국 독일이 2차 대전 중 유대인·슬라브인·집시를 대상으로 잔혹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히틀러는 교양과 이성, 그리고 도덕이란 가면 속에 감춰진 인간의 야수적 본능을 일시적으로 일깨운 게 아니었나라고 추리해 본다.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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