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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문 닫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아버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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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호 25면

피렌체 우피치(Uffizi)궁에 있는 페트라르카의 조각상. “펜보다 더 가볍고 즐거운 짐은 없다”는 말을 남긴 페트라르카는 항상 읽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우리말로 인간주의·인문주의·인본주의라고 번역하는 휴머니즘(humanism)은 인간이 이성과 책임을 통해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보하는 데 신(神)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다양한 휴머니즘의 유형 중에는 ‘기독교 휴머니즘’도 있지만 진정한 휴머니즘은 ‘무신론적 휴머니즘’이라는 주장도 있다.
‘휴머니즘의 아버지’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74)다.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페트라르카가 주역이었던 ‘고대 로마문헌의 복권·복원을 통한 인간의 재발견’이 14~16세기 르네상스에 그만큼 중요했다. ‘휴머니즘의 아버지’ 앞에 ‘르네상스’를 붙여 페트라르카를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아버지’라고 한정적으로 일컫기도 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사상가들도 휴머니스트였다는 시각 때문이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7>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페트라르카 작품에 영감을 준 로르 드 노브

로마 문학은 빛, 유럽 문학은 어둠
‘최초의 근대적 인간’이라는 타이틀도 그에게 부여된다. 페트라르카는 “나는 그 어느 곳의 시민도 아니다. 모든 곳에서 나는 이방인이다”라고 말했다. 중세 사람들은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가톨릭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했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의 아버지’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이 붙지만, 페트라르카가 한 일은 요새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게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가 한 일은 고대 로마문학을 문헌수집·편집·번역 과정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그는 또한 라틴어로 새로운 저작을 내놓으며 로마문학을 그의 시대에 맞게 계승했다.

사상적으로 중세를 연 것은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문을 닫은 것은 페트라르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가 로마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문학이 기독교 세계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神國)을 집필한 배경에는 서고트족(族)이 410년 로마를 침공해 약탈한 사건이 있다. 충격에 휩싸인 로마 사람들은 이 굴욕적 사건이 전통 다신교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데 대한 징벌이라고 수군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神)의 나라’가 ‘인간의 나라’에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나라’인 로마의 이교(異敎)가 ‘신의 나라’의 기독교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국 기독교는 승리했고 중세시대에 기독교는 ‘빛’, 문학을 포함해 로마의 이교도들이 남긴 것은 ‘어둠’이었다. 이를 뒤집은 게 페트라르카였다. 그에게 로마 문학은 빛, 당시 유럽 문학은 어둠이었다. ‘암흑기(Dark Age)’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암흑기 개념을 처음으로 전개한 것은 페트라르카가 1330년대에 수행한 작업이었다. 찬란했던 로마 시대에 비해 당시 유럽 문자문명의 수준이 어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20세기에 학계는 암흑기 개념을 폐기했다.)

페트라르카는 로마고전과 기독교가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에 의해 왜곡된 고대문헌들을 복원하고 복권시키는 작업을 했다. 얄궂게도 페트라르카의 손에는 신국이 쥐여져 있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1325년 페트라르카가 처음으로 산 책도 신국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지은 나의 비밀(Secretum Meum)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가상 대화를 한다. 내적인 영성의 위기를 겪고 있던 페트라르카는 아우구스티누스·베르길리우스·오비디우스의 저작을 읽으며 위기를 극복했다.

독서는 집필로 이어졌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저서에서 로마 시대의 인물들을 사례로 들고 그들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집필 목표는 기독교 신앙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구절이 아니라 로마 시대 인물과 저작, 로마신화를 인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유럽의 왕실들은 그를 왕족으로 대우했다.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찬미하는 아프리카로 그는 전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1340년에는 로마와 파리가 동시에 그를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 삼으려 했다.

페트라르카는 1345년 키케로의 서한문을 발견했다. 발견 자체가 큰 업적으로 인정된다. 페트라르카는 키케로를 본받아 편지를 쓰고 한데 묶었다. 왕·왕비·교황·추기경·주교들뿐만 아니라 키케로·호메로스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게도 수백 통의 편지를 썼다. 그를 본받아 ‘편지 열풍’이 불었다.

최초의 관광객이자 최초의 산악인
새 시대를 연 거목들에게는 ‘감투’가 많다.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단테와 더불어 ‘근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다. 그는 또한 ‘최초의 근대 시인’이다. 단테와 쌍벽을 이룬다. ‘노래책’이라는 뜻의 칸초니에레(Canzoniere)에서 그는 소네트(sonnet·일정한 압운(押韻) 체계를 지닌 14행 서정시) 양식을 완성했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는 특히 셰익스피어·릴케·밀턴에게 영향을 미쳤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셰익스피어는 페트라르카를 모방했으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양식은 페트라르카 양식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시성(詩聖)들 뒤에는 여자가 있었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페트라르카에게는 로르(Laure·Laura)가 있었다. 칸초니에레는 페트라르카가 짝사랑한 로르에게 바친 시를 모은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위대한 아름다움과 위대한 고결함이 함께 머무는 경우는 드물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로르가 바로 그 드문 경우였다. 사제가 되려는 계획을 전에 포기한 페트라르카는 1327년 아비뇽에 있는 성클레르(Sainte-Claire)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로르를 보고 정신이 획 돌았다.

페트라르카는 피부가 “눈보다 더 희고 차가운” 로르를 위해 366편의 시를 썼다. 263편은 로르의 생전에, 103편은 사망 후에 쓴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그가 지은 연애시에서 로르를 향한 욕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로르가 사망한 후 페트라르카는 로르에게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동정녀 이미지를 부여했다.

베아트리체와 마찬가지로 로르도 가공 인물이라는 설이 있지만 로르가 위그 드 사드(Hugues de Sade) 백작의 부인인 로르 드 노브(Laure de Noves)라는 설이 유력하다. 로르는 ‘새디즘(sadism)’의 어원이 되는 마르키 드 사드의 조상이다. 로르는 11명의 아이를 낳고 사망했다. 남편은 1년도 되지 않아 재혼했다.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남긴 그 유명한 에 나오는 비너스는 로르를 염두에 두고 형상화됐다는 설이 있다.

페트라르카는 ‘최초의 관광객’이다. 업무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의 즐거움 자체를 목적으로 유럽을 주유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페트라르카는 ‘인생은 여정(旅程)’이라는 관념을 갖게 된다. 이 또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인식이었다. ‘최초의 산악인’이기도 하다. 1336년 봄 그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 아비뇽 인근에 있는 몽방투(Mont Ventoux·1912m) 산에 올랐다. 높은 데 올라가면 뭐가 보이는지가 궁금했던 게 유일한 이유였다. 1920년대 에베레스트산 등정을 시도한 영국 산악인 맬러리(1886~1924)는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에베레스트가 거기 있기에(Because it’s there.)라고 대답했다. 맬러리와 비교해도 페트라르카의 ‘등산 근대성’은 손색이 없다.

부정직한 법률가들 싫어 법학 기피
2004년 페트라르카의 탄생 700 주년을 맞아 파도바대학 연구진이 그의 석관을 개봉했다. 1878년에도 석관을 개봉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두개골로 정확한 얼굴 모습을 컴퓨터로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DNA조사를 해보니 석관에 담긴 파편 상태의 두개골은 그의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것이었다. 다른 뼈들은 그의 키가 1m83㎝였다는 기록이나 당나귀에 치여 큰 상처를 입었다는 기록과 일치했다.

불멸의 이름을 남긴 페트라르카지만 가정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피렌체의 서기를 지낸 아버지는 공증인이었는데 아들 페트라르카에게 법학 공부를 강요했다. 페트라르카는 당시의 부정직한 법률가들이 싫어 법학 공부도 싫었다. 억지로 몽펠리에대학(1319~23)과 볼로냐대학(1323~25)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1326년 아버지의 사망 후 고전학자·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신심이 깊었던 페트라르카는 1330년부터 추기경과 주교 밑에서 외교 사절 등으로 일했다. 그는 사생아를 두 명 두었다. 아들 조반니가 1337년, 딸 프란체스카가 1343에 태어났다. 조반니와 프란체스카가 한 배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나중에 이들은 법적 자식으로 등록됐다. 페트라르카는 독서를 통해 백과사전적 지식을 축적했지만 아들은 딴판이었다. 아들 조반니는 총명했지만 책을 싫어했다. 페트라르카는 낙심했다.

페트라르카는 7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1374년 7월 19일에 사망했다. 딸이 발견한 그의 마지막은 손에 펜을 쥔 모습이었다. 페트라르카는 흑사병으로 어머니·아버지·아들·손자·로르를 잃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자신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독서하고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습관이 흑사병처럼 번지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페트라르카의 경우를 보면 근대적 인간은 읽고 쓰는 인간이다. 중세·르네상스·계몽기·근대를 거쳐 탈근대의 시대다. 어떤 활동이 가장 탈근대인에게 어울리는 활동일까. 오늘의 궁금증이자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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