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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에 대항한 현대 불문학의 걸작

중앙일보

입력

고규홍 Books 편집장

#1. 인생은 어디에 쓰는 건가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 했던가.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이야기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인문학 관련 도서는 기껏 7백권밖에 안 찍는다는 시절이다. 9백쪽이 넘는 소설 〈인생사용법〉(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책세상 펴냄)이 눈길을 끈다. '도대체 누가 정가 3만원의 저 책을 사서 볼 것이며, 인문학 도서 7백 권이 고작인 현실에 저 책은 펴내는 출판사는 도대체 어떤 출판사인가?' 중형 웹스터 사전 크기의 분량에 '인생 사용법'이라는 제목은 또 뭔가? 인생이란 게 사용법을 알아야 써먹을 수 있는 건가.

#2. 퍼즐처럼 흩어진 백개의 삶 조각을 찾아

프랑스에서 6년 동안 프랑스 문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3년에 걸쳐 한 권의 책 〈인생사용법〉을 한글로 옮긴 김호영 님은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지 만나봤다.

▶98년, 귀국한 뒤, 몇 개 대학에서 현대 불문학과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어요. 요즘은 프랑스의 어느 대학에 영화학 박사 과정을 등록해 놓고 있어요. 프랑스 문학 중에서는 주로 소설과 비평을 공부하고 있어요.

- 〈인생사용법〉은 9백 쪽이 넘는 요즘 보기 드물게 두꺼운 책이에요. 베개처럼 베고 자기에는 편안한 책인데, 읽기에는 만만치 않더군요. 하지만, 다시 한번 밑줄 그어가며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더군요.
▶ 이 작품은 현대 프랑스 문학의 모든 경향을 종합했다고 볼 수 있는 방대한 작품이지요. 현대 불문학의 한 경향이었던 누보로망에 대한 반발, 혹은 그 극복의 차원으로 나온 대표적인 소설이지요.

- 우선 간단히 작가 페렉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 페렉은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저는 프랑스에서 바로 이 책으로 박사 논문을 썼어요. 현대 프랑스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셋을 꼽으라면 패트릭 모디아노, 르 클레지오와 함께 꼽히는 게 바로 페렉입니다. 모디아노와 클레지오가 보다 대중적인 경향을 가지는가 하면, 페렉은 대중성은 떨어지는 반면, 예술성이나 그 깊이에서 좀 앞서가는 작가입니다.

- 사회적인 활동도 활발했던가요?
▶ 36년에 태어나 82년에 폐암으로 사망한 그는 초기에는 좌파적 문학을 했던 마르크시스트이고 중반부터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실험을 계속했어요. 소비 위주의 사회이던 50년대 후반부터〈빨치산〉이란 잡지의 주요 필자로 활동했지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이 그의 주요 화두였지요. 그의 첫 작품〈사물들〉(조르주 페렉 지음, 허경은 옮김, 세계사 펴냄)은 이같은 의도로 쓰여진 그의 첫 작품이에요. 소설은 중편 분량의 작품 열 편을 남겼고, 그밖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글을 남겼어요. 하다못해 바둑에 관한 책도 썼어요.

- 〈인생사용법〉은 내용만큼 형식에 있어서도 대단히 실험적이라고 생각되더군요.
▶ 페렉의 작품 중에는 유일하게 분량이 방대한 작품이지요. 그 만큼 형식과 내용에 있어 모두 공을 들인 작품이고, 스토리의 전개방식도 독특해요. 파리의 서민 거주 지역의 한 건물이 배경인데, 이 건물에는 1백개의 방이 있어요. 이 방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점은 75년이라는 한 시점인데, 각 방의 사물이나 사진을 보고 그것들에 얽힌 인간사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1백여년이 넘는 시간을 오락가락 합니다.

- 퍼즐을 풀어나가는 바틀부스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도 특이합니다.
▶ 예, 백만장자인 등장인물 바틀부스는 이 소설을 하나로 엮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20세 쯤에 삶의 부조리와 모순에 공허감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세척제로 깨끗이 씻어내듯 완전히 무화(無化)시키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바로 가장 단순한 유희인 퍼즐 맞추기지요. 퍼즐의 그림들은 해양화입니다. 바틀부스는 그 퍼즐을 위해 10년 동안 그림을 배우고, 20년 동안 세계를 일주하며 그림을 그리고, 나머지 20년 동안 퍼즐을 맞춥니다.

- 세상의 부조리에 휩쓸려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싶은 거군요.
▶ 그렇지요.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를 담은 겁니다. 이를테면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신이 우리를 경멸했기 때문에 우리도 신을 멸시하며 살아갈 수 있다. 멸시로 극복되지 않는 삶은 없다"라고 한 것처럼 세상과 삶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는 겁니다. 분량으로만 봐서도 그리 가벼운 책이 아닌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끝까지 읽고나면 1백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퍼즐에 엮이듯 하나의 거대한 삶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 부조리한 사회의 복잡 다단한 세계를 퍼즐 맞추듯 하나 둘 짜 맞추면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삶의 정수를 보여주겠다는 게 작가의 뜻이군요.

#3. 몹시 즐겁지만 매우 괴로운 언어유희

- 이 작품에는 지독한 나열형 문장이 되풀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문이 좋아서인지 그리 지루하지 않고, 마치 방의 풍경이 눈에 보일 듯 잘 그려놓은 그림처럼 혹은 영화처럼 또렷이 보이는 느낌입니다.
▶ 워낙 원작의 묘사 방식이 독특하고 치밀합니다. 페렉은 묘사에 있어서도 기존의 소설들을 거스르고 있어요. 기존의 소설들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묘사를 하지요. 그러나 페렉은 이 작품에서 거꾸로 묘사를 먼저 걸어놓고, 필요하면 스토리를 붙이는 식입니다. 그러나 스토리가 묘사에 종속되는 건 아니고, 함께 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겁니다.

- 그러고 보니, 방 안에 놓인 사진을 묘사하기 위해 사진 안에 담겨 있는 스토리를 끄집어내고 있군요. 어쨌뜬 내용과 형식 모두 현존하는 것에 대한 전면 대항이군요.
▶ 그러나 페렉은 무조건 대항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루할 정도의 세밀한 묘사는 자잘한 일상에 대한 지독한 애정, 에멜무지로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일상들을 포착해 최소한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이죠. 그건 삶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겁니다. 즉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중성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 51장의 시를 언어유희의 극치라고 하는데, 한글로 옮긴 상태에서는 별로 느낌이 없어요.
▶ 번역의 한계였어요. 이 시의 첫 3행의 맨 끝의 글자는 a, m, e 로 나오거든요. 그건 프랑스어의 '영혼'이라는 뜻의 단어예요. 게다가 활자의 유희까지 펼쳐집니다. 이 시를 원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같은 글자가 대각선으로 쭈욱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 대단하군요. 또 다른 언어유희도 있었을텐데요.
▶ 물론입니다. 그런 것은 페렉의 다른 작품들을 참고하면서, 최대한 맛을 살리려고 애쓰다 보니 의역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책이 두껍게 한 권으로 나온 것도,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페렉의 뜻이 담겨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그래서 프랑스의 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내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 다른 작품들도 그런 식인가요?
- 예를 들면〈실종〉(미번역)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걸 제가 번역하려다 실패했어요. 3백쪽 분량의 그 작품은 프랑스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스펠링 e 를 빼고 쓰여졌어요. 그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 우리 식으로 하면, 시옷을 빼고 썼다는 거네요.
▶ 시옷보다는 훨씬 더 많이 쓰이는 모음 'ㅏ' 나 'ㅓ' 를 뺀 것이라고 봐야 해요. 프랑스어의 여성형 어미에는 당연히 e가 나와야 하거든요.

- 그런 작품을 한글로 옮기면 그 맛이 살아날까요?
▶ 저는 무모하게도 'ㅏ'나 'ㅓ'를 빼고 옮기려고 했거든요. 불가능하다는 건 금방 알게 됐어요.

- 한글로 옮기는 일이 어려우셨겠어요. 출판사 측의 보도자료에 보면 '번역의 한계에 도전한 책'이라고 돼 있더군요.
▶ 어려웠어요. 3년 전부터 붙들고 있었는데, 너무 지긋지긋해서 작년 여름 두달 동안은 가족과 별거하면서 아예 고시원에 들어가서 매달렸어요.

#4. 올바른 사용법을 찾는 인생들

- 이 작품을 제임스 조이스의 대작〈율리시즈〉와 비교해 이야기하더군요. 〈율리시즈〉가 의식의 순간순간 흐름들을 보여주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상황과 사물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요?
▶ 페렉은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자고 마음 먹은 겁니다. 20세기 들어 프랑스 문학에서는 종합적인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는데, 페렉은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 유럽권 문학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데에 오해도 많을 것같아요.
▶ 주요 저작들보다 주변 작품으로 그 작가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경우도 있어요. 이를테면 플로베르의 경우도 가장 중요한 작품인〈부바르와 페퀴셰〉(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책세상 펴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보바리 부인〉이 더 많이 알려졌잖아요.

-〈지붕 위의 기병〉을 대표작으로 갖는 장 지오노가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그 이미지를 굳히는 것도 그런 경우의 하나겠지요.
▶ 그런 면에서 출판사에서 굳이 이 책을 선택한 것은 페렉의 다른 가벼운 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상업성이 없어도 페렉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소개해 그 작가의 본질을 알리자는 것이었어요.

▶김호영 님과 함께 이야기한 책들

* 인생사용법(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책세상 펴냄)
* 사물들(조르주 페렉 지음, 허경은 옮김, 세계사 펴냄)
* 시지프스의 신화
* 율리시즈(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범우사 펴냄)
* 부바르와 페퀴셰(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책세상 펴냄)
* 보바리 부인
* 지붕 위의 기병
* 나무를 심은 사람(장 지오노 지음, 김경온 옮김, 두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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